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217] 그리스도와 함께 50년 (1)

그리스도와 함께 50년 (1)


내가 예수님 얘기를 처음 들은 것은 여덟 살 때 우리 집 사랑방이자 아버지의 서재(?)에 찾아온 ‘매서인’에게서였다. ‘매서인’이란 성경전서, 쪽복음 등을 괴나리봇짐에 둘러메고 주로 서당이나 어떤 모임에 ‘불청객’으로 ‘김삿갓’처럼 마구 들어와 ‘전도’하는 일종의 방랑 선교자였다. 우리 사랑방은 서쪽에 따로 지은 ‘봉계정사(奉溪亨舍)’라는 현액 걸린 길쭉한 딴채로 되어 있었다. 내 알기에도 딴 매서인이 대여섯 번 찾아왔었다. 전도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그래서 저녁 먹고 자고 아침 먹고서 성경 한권 내놓고 떠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버지는 원래 과묵하셔서 백 마디에 한 마디 정도 응답하면 잘하는 축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공맹지도(孔孟之道)를 하는 사람이오. 이단을 숭상하면 해로울 뿐이라(政平異端이면 斯害也已)고 했소.”

그러면 ‘전도인’은 『논어』, 『맹자』에 있는 말들을 인용하며 예수교를 변증한다. 그러나 애당초 안 듣기로 맘먹고 있는 분에게 말이 먹혀들 까닭이 없다.

언젠가 어느 전도인은 하루 낮 하루 밤을 꼬박 이어 전도하다가 떠날 때에 하도 답답해서였든지 앞에 있는 놋화로를 끌어다 두들기면서 “화로도 두들기면 소리가 나는데 선생은 어째서 그렇게도 반응이 없소? 선생의 자녀 중에라도 혹시 믿는 사람이 날지 모르니 이 성경책을 드리고 가겠소.”라고 했다. 그것은 국한문 『신약전서』였다.

어떤 분은 쪽복음이며 전도지 등을 두고 가기도 했다. 우리 형님은 그 쪽복음 책을 찢어 담배를 말아 피우기도 했다. 나는 그 쪽복음 책에 먹칠도 하고 일부러 잡서(雜書)로 메우고 찢고 꾸기기도 했다. 또 “나는 아버님 편이다. 절대로 예수는 안 믿을 거야!” 하고 혼자 다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도인의 전도 내용은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고, 무당의 굿도 물론 마귀를 섬기는 것이라고 했다. 십계명 중에서도 우상숭배가 제일급 제사 행위, 불상 앞에서 제(祭)드리는 것, 탁발승에게 시주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되었다. 이런 교훈은 기독교 문명 이외의 모든 이교 문화가 예외 없이 악마의 소산이라는 초대 선교사들의 신학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오랜 훗날에서야 알아차렸다. 그러니 유생의 예의에 대한 긍지와 스님의 무아해탈(無我解脫), 니르바나에의 깊은 철리가 이런 ‘양이(洋夷)’의 오만을 쉽사리 용납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대로 불교는 승려 종교로 산간에 격리였으니만큼 기독교도로부터의 냉대가 크게 사회 문제로 화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유교는 500년 이상 국교로서 전 국민의 생활규범으로 확립됐으니, 외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당시에는 개인주의적인 자아의식보다도 혈연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가문과 가족의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전체 가문으로서의 반대, 심하면 파문(破門)에 해당하는 족보에서 제명이란 위협도 적잖게 있었다. 신교의 전래는 정부로서 금교령을 해제한 후였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런 사회적 압력과의 대결이란 그리 쉬운 결단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내가 예수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열 살 때 향동소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향동소학교는 4년제, 문부 인가까지 받은 자격 갖춘 소학교였다. 교사로서는 김희영(金廳榮) 씨 한 분, 네 학년을 두 반으로 나누어 복식으로 가르쳤다. 그는 내 이모님의 손자니까 이질, 즉 내게 조카뻘이었다. 그는 서울 오성학교(五星學校) 제2회 졸업생으로 풍부한 재능과 넘치는 정력의 소유자였다. 하루는 요새로 말하면 사회생활 시간이랄까? 어쨌든 기독교에 대하여 강의했다. “기독교는 예수라는 이가 세운 것인데 예수는 유대 사람으로서 유대 나라 종교인 유대교를 개혁하다가 유대 교인들에게 잡혀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었다. 그러나 그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 때문에 그가 말하던 새 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물론 그의 제자들이 한 소리겠지만, 그 신화 때문에 갑자기 그 당시의 전 세계에 퍼진 것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승천까지의 더 자세한 얘기를 했다. 나는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같이 지내고 모두들 쳐다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공자도 맹자도 석가도 못하던 일이다. 그런 분이라면 믿을 만도 하겠구나.” 하고 혼자 생각했다. “전도인들은 믿으면 천당 간다는 얘기만 했는데…….”

그러나 이런 감회도 반짝하고 사라진 번갯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어쩌면 그때 나의 어린 혼이 하나님 손에 쥐어진 부싯돌이었는지도 모른다.

범용기(凡庸記)에도 적었지만 내 학업 경력이란 소학 4년, 간이농업학교 2년 합하여 6년밖에 안 된다. 아홉 살 때까지 집에서 한문 읽은 것도 학력이라면 학력일지 몰라도 그것도 물론 초학 정도도 못 되는 것이었다. 간이농업을 마친 직후부터 회령군청 3년, 웅기금융조합 3년의 생활이란, 그 당시의 세태 그대로 술이란 종교와 계집놀이란 행세였다. 아직 십대인 나도 어른들께 끌려서 그런 대로 드나들었다. 그러나 결혼 전 동정(同情)만은 지켰다. 내가 지켰다는 것보다도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이 골라잡지 않았더라면, 나는 극상했자 금융조합 부이사 또는 이사 정도에까지 갔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천장이었을 것이고, 그동안에 장사꾼들의 종교(?)인 주색접대로 몸이 곯고 마음이 썩어서 채 못살고 골로 갔을 것이다. 아마 큰 변동이 없는 한 그렇게 됐을 것이다.

1921년 봄, 하나님은 나를 수령에서 건져내 주셨다.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방법까지 허용하셔서 나를 서울에 밀어 보내셨다. 내 서울에서의 정규 학업이란 중동학교 고등과 한 학기뿐이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지만 오랜 후일에는 그것 역시 하나님 은혜였다고 감사한다.

그리스도에게로

같은 해 늦가을, 서울 시내 장로교회들 연합으로 승동 예배당에서 김익두 목사님의 서울에서의 첫 부흥회가 열렸다.

사람 홍수 위에 ‘기적’이란 무지개가 하늘에 다리를 놓는달까? 어쨌든 인기 만점이었다. 매인 데 없는 방랑소년(?)인 나도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았다. 김 목사님은 믿기 전에 황해도 장돌뱅이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언어는 민중의 말 그대로였다. 구수한 예화로 엮어가는 설교가 부담을주지 않았다.

열흘 집회의 마지막 날 나는 믿기로 작정했다. 그의 설교는 대략 이런내용이었다.

“닭이 달걀에서냐? 달걀이 닭에서냐? 아무리 따져봤자 끝이 없다. 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가 지었나? 이것도 끝이 없다. 여보시오, 하나님도 누가 지어줘서 하나님 노릇한다면은 그건 하나님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조물주이시고 그 이상은 더듬어지지 않는 분이오. 그러길래 성경 맨 첫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고 했잖소? 그걸 누가 봤소? 이건 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알게 되는 것이고, 여러분이 그 주시는 믿음을 받아야 알게 되는 것이오. 그래서 내가 지금 ‘믿으라’고 권하는 게 아니오? 자, 어디 믿어 봅시다. 믿겠다고 작정하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새사람이 될 거요. 자, 한번 노래합시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자, 손뼉 칩시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말하자면 이런 식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수긍하고 받아들였다. 가슴이 화끈해졌다. 맘속에서 생명의 분수가 치솟았다. 변하여 새사람이 됐다는 실감이 났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딴 사람이 되었다. 당장 찬송가를 샀다. 기도의 욕심쟁이가 됐다. 밤새는 줄 모르고 성경을 탐독했다.

‘성경’ 얘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일화를 덧붙이겠다. 1921년 여름방학 바로 전에 나온 《학생계》란 잡지에 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들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유명한 선생님들이 제각기 적어 보낸 것이었는데, ‘성경’, 특히 신약성서를 빼놓은 분은 한 분도 없었다. 그때 나는 우리 시골 집 문갑 속에 사장된, 어느 전도인이 두고 간 국한문 『신약전서』 생각이 났다. 그래서 방학에 갔다가 그 책을 갖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읽으려 했지만, 잘 모르기도 했고 읽어지지도 않았다. 믿겠다고 작정한 다음부터는 그 성경이 그렇게도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달라졌을까? 나는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예수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 믿는다는 것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었다.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 믿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를 믿는 것이었다. 내 새로운 존재를 성령과 관련 없이 생각할 수도 없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이런 신앙 경험에서 나온 말이요, 숫자 계산에서 하는 말이 아닐 것이라고 어슴푸레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보면 내 입신(入信)의 동기는 이성의 길을 더듬는 데 있었고, 성령의 감화도 성경의 재발견이라는 이성의 활동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말하자면 신학적인 방향에서였다고 하겠다.

위에서 말한 그 성경책은 후일에 어느 수감 중인 죄수 친구에게 차입한 후로 그 행방을 모르게 됐다. 그러나 아버님 앞에서 놋화로를 두들기며 반응 없는 선교의 노고를 탄식하던, 그 어느 방랑 전도자도 이제는 자기 예언이 성취된 기쁨을 어디선가 흐뭇하게 느낄 것이 아닐까 싶다.

제자직

나는 예수님께 사로잡힌 것 같았다. 학사금도 못 냈으니 학교에 갈 수도 없었지만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인사동 입구 경성도서관 분실에서 기독교 서적들을 덮어놓고 읽었다. 얼마 후에는 그 방면의 읽을 책이 없어서 문학서적들을 읽었다. 우리말 서적은 거의 없다시피 된 일제시대여서 전부가 일어로 된 책들이었다. 카가와의 『사선을 넘어서』, 『담벼락 소리 들을 때』, 『태양을 쏘는 놈』 등, 미야자키의 『아시시 프란체스코』, 우치무라의 저서들, 『톨스토이 전집』, 『빈자의 일등』, 『레미제라블』, 『아이반호』 등 지금은 기억에 없지만, 그밖에도 잡지, 잡서 등을 무던히 잡독했다. 예배당에서의 평양신학교 출신 목사님들 설교는 대체로 환골탈태한 자기 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기도할 때에도 “자기 생각이 섞이지 않은, 순전한 하나님 말씀을 말하게 해 줍소서.”라고 했다. 스스로 축음기판이 되려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환골탈태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말씀이 그 사람 혼 속에 소화되어, 그 사람의 말로 탈태돼 나오는 때에만 증언으로서의 설교가 될 터인데, 하나님 말씀이 통째로 들어갔다가 통째로 나온다면 말씀의 설사병 환자밖에 되지 못할 것이 아닐까! 어쨌든 나는 싫었다. 보기도 듣기도 싫었다. 기성 교회에 대한 나의 불만과 기성교직자에 대한 나의 불신은 그때부터도 현저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날의 예배와 어느 교파 어느 교회의 부흥회 또는 특별 집회, 어느 기관의 강연회 등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매주일 오후 2시에 있던 중앙 YMCA의 일요 강좌에는 3년 개근이었다고 생각된다.

감리교 정동교회 특별집회 때에는 그 회당 한 구석에서 하루 금식기도도 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배고픈 것을 참느라고 기도했다. 율법적이었을 뿐이다.

승동교회원으로

나는 승동교회에 적을 뒀다. 그것은 그때 고창고보에서 교목으로 있다가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오신 고 김영구 목사님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도 출신으로서 구한말에 탁지부 주사로 있다가 애국지사 이동휘 선생을 따라 만주로 들어갔다. 이동휘 선생이 시베리아로 가실 때 그도 따르려 했으나, 성재(이동휘 선생의 아호) 선생은 그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너는 본국에 돌아가 신학 공부하고 목사가 되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귀국하여 일본 고베신학교를 졸업하고 고창고등보통학교 교목으로 있다가 승동교회를 맡은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지성적이면서 영적이고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의 설교를 기대하며 ‘승동’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밖에 설교하지 않았다. 실망하고 돌아오고서도 ‘이번에는’ 하고 다시 기대하곤 했다. 나는 믿은 지 3년이 지났지만 세례를 받지 않았고 받을 생각도 없었다. 형식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김영구 목사님은 나를 불러 타일렀다.

“신앙생활에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관계도 있는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해서 동거한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나무랄 수는 없어도 그것이 사회의 공언을 받기 위해서는 결혼식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세례는 ‘신자’로서 전 세계 교회의 공인을 받는 예식이다.”

그래서 나는 1923년 어느 날 저녁, 후에 한국신학대학을 설립한 김대현 장로님의 시취문답을 거쳐 김영구 목사님께 세례를 받았다. 그때 나는 관습적인 크리스찬이 아닌 진짜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어떤 분은 피어선 성경학교에 다니라고 권면하기도 했다. 평양신학교에 가라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 동양대학 문화학과에 다니던 만우(송창근 형의 아호) 형이 가로막았다. “에잇, 사람 버리려고 그런 델 가? 싹 걷어치우고 일본 갈 궁리나 해요.”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학교 공부도 못하면서 죽도록 고생만 했다. 무일푼의 자취에서 얻은 영양실조, 월급 못 주는 직장에서의 대가 없는 집무, 그래서 식비 못내는 하숙생으로 섣달그믐 밤 눈 속에 추방된 방랑객, 신실한 고향 후배 김영구 죽음 등 3년은 그야말로 고해(苦海)였다. 요는 돈 문제였다. ‘돈’과 어떻게 대결하나 하고 생각했다.

1) 돈 벌기 위해 돈을 번다.
2) 좋은 사업하기 위해 돈을 번다.
3) 돈 자체를 무시하고 산다.

나는 제3을 택했다. 돈이 있어야 산다지만 살기 위해 돈 앞에 굽실거릴 생각은 없었다. 무일푼의 행려자로 사랑만으로 산 아시시 프란체스코가 맘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하숙에서 쫓겨나도 밤 새워 가며 혼자 눈 속을 걸어도 혼은 도도하고 의기는 드높았다. 이 순간에 하나님이 데려가신다면 얼마나 영광일까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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