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4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95) 다시 한신 캠퍼스에 – William Scott

[범용기 제2권] (95) 다시 한신 캠퍼스에 – William Scott


스캇 목사는 부산 피난 중에 65세로 정년이 되어서 귀국명령이 내렸었다.

70세까지만 한국에 있게 해달라고 수많은 교직자와 교우들과 ‘한신’ 당국에서 캐나다 선교부에 두세번 청원한 일이 있었다. 만 70세가 ‘극한선’이니까 그때까지만 허락한다하여 환도하여 ‘한신’과 ‘기장’을 위해 큰 공헌을 세웠다.

그는 ‘한신’에서 ‘교회사’를 강의했다.

그가 서울에서 기차에 오를 때, 그는 ‘석별’(惜別)하는 한국 친구와 동지들의 진정(眞情)을 몸에 배도록 마음에 담았다.

기차는 떠나가는데 기차트랩에 매달려 같이 달리는 한국 친구들이 수두룩했다.

위에서도 부분적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6ㆍ25 동란중, 중국에서 추방된 선교사와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 일본에 퇴거했다가 피난지 부산에 먼저 귀환한 캐나다 선교사 두 분이 스캇 박사와 프레이져 박사였다. 두 분은 신학적으로 김재준 계열을 지지해 왔고 그것이 캐나다 연합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의 방향이란 것을 한국선교사 모임에서도 명백하게 증언했다. 그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은 스캇 박사를 한국 선교사회에서 소외시킨 일이 있었다.

이 사건 때문에 캐나다 연합교회는 스캇 박사 지원을 강화하게 됐으며 따라서 한신 계열의 교회들에 대한 동지적 접근과 결합도 촉진되는 것이었다.

스캇 박사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십대 소년 시절에 단신 캐나다에 옮겨와서 고학으로 대학 영문과를 마치고 뱅쿠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지금 유니온 신학교 전신)을 졸업했다. 졸업하자마자 어느 부유한 가정의 영양인 약혼자와 뱅쿠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곧 신혼여행 삼아 한국에 선교사로 떠났다.

그후 70평생을 한국에 바친 분이다. 그는 전형적(?)인 영국신사로서 영시문학에도 조예가 깊다. 그리고 영국식 유며에도 자유로운 분이었다. 따라서 그는 정통신학이나 ‘교회주의’에 고정되기에는 너무 ‘인간적’이고 문인적이었다.

그는 김재준과는 14세 연장인 선배이면서도 간격없는 동지로 고락을 같이 했다.

김재준 계열이 한국 장로교 총회에서 이단으로(“이단”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내용은 교권에 의한 이단재판이었다) 규정되어 파직 선고가 가결되었을 때 그는 김재준 신학을 전세계 신학자들에게 묻는 서한을 썼다. 김재준이 초한 것을 스캇 박사가 영역했다.

그리고 1953년 결국 ‘기장’이 장로교 총회에서 분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최후 단계에서 ‘총회분립 선언서’(김재준 초) 영역도 스캇 박사의 손으로 된 것이다. 그때 김재준은 스캇 박사가 하나하나의 단어 선택과 문장 구성에 얼마나 치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에 경탄했다.

훨씬 후에 된 일이지만 캐나다 연합교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와의 자매 관계가 맺어지기까지에 스캇 박사가 담당했던 진지하고 신중한 중간 역할을 한국과 캐나다 교회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기록일 것이다.

그때 미국 선교사들은 외국 선교부와의 재정적 ‘Pipe Line’ 단절은 그대로 한신의 자멸을 의미한다고 믿었던 것이란다.

그러나 사실 한신 측에서는 한국교회의 자주자립을 위한 강한 결의로 출발했기 때문에 선교지 교회와의 결연 같은 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한국 천도교, 유교, 불교 등이 모두 자주자립의 종교기관인데 기독교만이 외국교회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자랑일 수 없다고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선교사들은 미국이나 캐나다 돈 없이는 한신이 유지될 수 없고 미구에 폐문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신 측에서 스캇 박사를 아낀 것은 온전히 신앙동지로서의 의리와 신뢰에 기인한 것이요 그 이외의 다른 아무 저의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1977년 새해 91세의 고령인 스캇 박사를 찾아 사설 양로원에 방문했을 때 그는 여전히 정정하였고, 아래와 같은 그 자신의 사진과 소희를 내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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