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4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92) 돌아와 보니 – 그 후의 조선출

[범용기 제2권] (92) 돌아와 보니 – 그 후의 조선출


조선출은 실직자가 됐다. 어디 갈데도 없고해서 거처를 옮기지도 못한다.

그 동안에 모친상(喪)도 당했다.

청주제일교회에서 청빙서가 왔다. 나는 그를 권했다.

“시골 어느 교회에 가서 3년동안만 목회에만 충실해라. 그리하면 네 신앙과 인격에 덮였던 암운(暗雲)이 걷힐 것이다. 그런데 청주제일교회는 큰 교회일 뿐 아니라, 충북에서 모교회다. 딴 생각말고 승낙해라.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의 ‘목회’에만 전념해라….”

그는 그러기로 했다. 그리고 부임했다. 그러나 ‘버릇’은 고쳐지지 어려운 것 같았다.

세광학원 이사진, Y.M.C.A. 이사진 등등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결국 Y.M.C.A. 총무가 됐다. 더 큰 대구 Y. 총무로 옮겨 앉는다. 청주제일교회는 공연히 어수선하게만 됐다. ‘한신’ 졸업생 안봉걸 목사가 차분하게 목회해서 차츰 정돈되어 갔다.

그 후 지금까지의 얘기는 생략한다.

김춘배 대신에 C.L.S. 총무가 됐다고 들었다.

그는 유능한 사람이다. 그러나 ‘수단’이 ‘진실’을 넘어서 뛴다. 출세와 권력욕이 양심과 정의를 상회(上廻)한다.

억지로 ‘Somebody’되려는 영웅주의가 그의 생애를 그르친 것이 아닐까?

그는 송창근, 함태영에게는 ‘충신’으로 자처하는 것 같았다.

내가 신학교 학장직을 송창근에게 물려줬을 때, 조선출은 명동 어느 다방에서 ‘축하연’을 베풀고 나까지 초청했다.

강원도에서 개척교회를 목회하는 강원하는 우리집에 찾아와 통곡했다. 같은 사건에서도 세태(世態)는 이렇게 두 극(極)을 달린다.

송창근은 김천 목회시절에 김정준, 정대위, 조선출을 특별히 사랑했다. 어느날 밤, 그들 셋은 함께 촛불 아래서 송창근에게 세례를 받았다. 정대위는 얼마동안 부목사로도 같이 일앴다. 공덕귀도 그의 밑에서 전도사를 시무했다.

그러니까 조선출이 송창근의 학장취임을 ‘경사’로 여기고 자축한다는 것은 이유없달 수 없겠다. 그 자리에 나까지 초대한 것은 나를 ‘야유’하려는 악의에서라기보다도, 내가 송창근과 형제같이 지내왔으니 자기들 삼촌처럼 생각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물론 ‘호의’만으로서의 해석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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