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7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80) 캐나다연합교회 예방과 그 후유증 – 짠ㆍ리와 함께 수터 목사를 찾아

[범용기 제2권] (80) 캐나다연합교회 예방과 그 후유증 – 짠ㆍ리와 함께 수터 목사를 찾아


짠ㆍ리는 내게서 ‘수터’ 얘기를 듣고 그 인물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

기회를 만들어 자주 만나기도 했다. 그의 교회에도 가끔 나간다. 나는 수터를 예방할 의무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수터’는 어느 시골의 미조직 교회에 임시목사로 있었다. 짠ㆍ리와 나는 짠리의 헌 차를 타고 그리로 가게 됐다. 마침내 그의 사택에 도착했다.

며칠 유할 뱃장이었다. 그의 사택은 지붕밑 방까지 치면 3층이 되는 큰 집이었다. 그 대신 교회당은 큰 집 마루방 정도였다. 그러나 교회당으로서의 품위와 장치는 있을대로 다 있었다.

‘수터’는 선원(船員) 출신으로서 체격이 장대하고 성격이 정직하면서도 거칠고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목소리는 ‘도라’(銅鐘)나 ‘징’ 울리듯 쩌렁쩌렁한다. 그는 성직자로 부름받았다. 목사될 결심으로 임마누엘 신학교에 들어갔다. 마침 김정준이 임마누엘 재학 중이어서 ‘동지’가 됐다. 그래서 해방직후 새 선교사의 상(像)을 한국교회에 심는다는 결심으로 부인과 함께 한국에 왔다. ‘어윙’과 동시에 부임했다. 그는 낡은 선교사들의 ‘틀’에 판박히지 않으려고 애썼다. 부서지다 남은, 난방장치도 없는 ‘한신’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떨기도 했다. 그는 캐나다 선교사회의 회계였지만 급하게 도와줘야 할 일이 생기면 결재없이 우선 써놓고 본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의 ‘인기’는 그가 독점하다시피 됐다. 간데마다 ‘수터’ 얘기였다.

한국 선교사로 한국에서 평생을 지낸 다른 캐나다 선교사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수터’는 선교사 간의 친교를 파괴한다.”

“선교비를 부당, 불법하게 썼다.”

“선교사의 위신과 체면을 손상시킨다.”

“호모섹스 상습자다” 등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어느 젊은 여선교사는 내 집에 찾아와서 울면서 원망조로 호소한다.

“우리도 평생을 한국교회에 바쳤는데 갖온 ‘수터’는 그렇게 위해 주고 우리는 소외시키니 억울하고 슬프다는 넉두리도 곁들인다.

나는, “어느 누구를 의식적으로 소외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 후의 새 선교사상을 모색하는가운데서 ‘새 인간상’, ‘새 역사 창조’ 등등의 세계적 변혁의 물결에 동조하는 불가피한 현상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선교사의 업적 평가나 ‘소환’ 결정 등등은 김정준이나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래잖아 열릴 기장총회에 제의하고 거기서 건설적 비판적인 보고와 의견을 공개하십시오.”

그러나 이 조치가 있기 전에 캐나다 연합교회 본부에서 사무타협상이 필요한 일이 있으니 잠시 귀국하라는 전달이 왔다. 수터 부부는 급히 귀국했다.

기장총회에서는 캐나다 선교사대표의 준비되고 세련된 긴 연서를 경청했다. 그리고 캐나다 선교사 전체에게, 그들의 업적을 찬하하고, 그들의 건설적인 협력에 감사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에는 ‘수터’를 다시 보내줄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수터’는 그 길로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넌 것이었다.

그런 인연도 있고 해서 짠ㆍ리와 나는 시골의 그의 교회에 찾아가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말한다.

“그때 기장총회에서 캐나다 선교사 전체와 자기와를 놓고 ‘양자택일’할 경우에 캐나다 선교사 전체를 제쳐놓고 자기 한 사람을 택할 줄로 믿었고 또 그러기를 바랐었오” 했다.

“그건 자기에 대한 과대 망상이다. 개인으로서는 그런 선택이 가능하다. 그러나 ‘총회’라는 ‘집단인격’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하고 나는 달랬다. 그는 지금 ‘뉴 마켓’에서 매주 천명 이상 모이는 큰 교회를 혼자서 목회하고 있다. 하여튼, 그는 호걸풍의 인간이다.

언젠가는 다시 한국에 나갈 생각이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 후에도 짠ㆍ리는 연방 YMCA 숙소에 나를 찾아온다. 그랬는데 어찌된 셈인지 달포가 지나도 ‘인사절’(人事絶)이다. 전화를 걸어도 좀처럼 받아지지 않는다. 하루는 그가 ‘입원중’이라길래 겸사겸사, 좋은 기회라고 나는 문병하러 갔다. 그는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병원 경리과 여직원 자리가 그의 사무실 곁에 있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나도 자주 봤지만, 그녀는 애버리지 이하의 아름다움이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는 말이 옳다고 나는 혼자 생각하곤 했다. 그녀의 부모는 정통 유대교인으로서 히틀리의 유대교 탄압 때에 도망하여 여기저기 굴러, 캐나다에 정착했단다. 그렇게 심한 히틀리 치하에서도 그녀는 히부리 말을 배웠고 유대인 소학교와 고등소학을 졸업하고 유대교 명절을 어김없이 지켜온 처녀였다.

그래서 그는 할례받고 유대교 귀의자임을 고백했다. 그래서 약혼이 허락됐다. 하루는 그녀의 부모가 나를 디너에 초청했다. 유월절이었다. 디너는 누룩없는 빈대떡과 쓴 쑥과 팔레스티나에서 보내온 포도주였다.

내가 “쉘마 이즈라엘 야웨 엘로히누 야웨에 하드…”라는 신명기 6장 4절을 히브리어로 뇌였더니 깜짝놀란다. “바라 엘로힘 하솨마임 우하아아레쯔”라는 창세기 1장 1절도 외였다. 그들은 기분이 누그러진다. 이방인으로서는 기특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결국, 짠ㆍ리는 그녀와 약혼했다. 나는 어느날 고급 중국반점에 그들을 초대했다. 약혼 축하라는 명목에서다. 그리고 축복했다. 그들은 달콤한 첫 사랑에 잠겼다. 물론 YMCA에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귀국한 다음에도 편지 왕래가 있었고 그녀와의 신접살림 사진도 보내 왔었다.

그럭저럭 전충림 가정과도 통하게 됐다. 지금 피아노 연주자로 유명한 그의 막내 딸 ‘인선’이 다섯 살 때였다. 선단(仙檀)은 첫 잎에서부터 향기롭다는 속담과 같이, 다섯 살에 벌써 미국 NBC 피아노 방송프로에 뽑혀 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못 만났다.

황대연이란 의사분이 ‘스네익 리버’라는 먼 고장에서 개업하고 있다고 했다. 그도 동족이 그리웠던지, 나에게 원거리 전화로 반갑다는 인사를 했었다.

그 밖에 시청에 근무하는 한국인이 한분 있다고 들었다. 우리 민족의 해외 발전이 그렇게까지 낙후됐다는 사실을 개탄했다.

* * *

일본인 교회 부인회에서는 회장이라는 중년 여자가 극성스레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녀의 초청으로 어느날 밤 그 그룹에 가서 설교했다.

꽤 성대하게 ‘파아티’도 열어준다. 그 또래의 부인이 약 15명 모였었다.

‘후까미’란 이름이던가 한 일인 목사는 맨 마감에 잠깐 낯을 선보인 것 뿐인데 ‘되게’ 오만해 qhduTe. 훤칠하게 큰 키에 새까만 콧수염을 달고 있었다. 부인회장의 남편은 Baker로서 Bakery에 취직해 있었다. 꽤 늦게사 집에 돌아왔다. 내게 인사하고 집구경도 시켜준다.

꽤 큰 집인데 일본 막부시대의 ‘마끼에’(券繪) 따위로 벽을 메꿨던 것 같다.

YMCA에 유숙하는 동안, 나는 주로 카아튼 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 목사는 ‘호호야’(好好爺) 타입의 호인(好人)이었다. 나를 소개하기 위한 ‘친교파티’도 열어 주었다. 회중은 수십명 밖에 안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화이트 크리스마스 날 밤에는 그 교회당 위 아래가 배불러 터지도록 모였다. 나다닐 기력이 없이 집안에 유폐되어 있는 노인들, 입원 중의 회원들, 양로원, 불구자, 불구아동 등의 사회사업기관, 해외선교기관과 선교사들 등등에 보낼 선물예산에 충당할 헌금이 이날 밤에 나오는 것이었다. 진짜 크리스마스 날에는 예배보는 교회도 거의 없었다.

거리에는 술 먹고 떠들며 공연히 으스대는 10대 소년(?)들 행렬이 난잡했다. 이 폐풍을 막기 위해 시내 목사들은 성탄날에 금식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역사의 전환기(Turning Point)에서 그런 정도의 미봉책이 얼마나 효과적이겠나 싶었다.

헌 옷을 새 천으로 꿰매는 식이 되지 않을까. 역사 전체에 도전하는 큼직한 싸움이 벌어져야 한다. 교회가 그것을 못하면 공산혁명가들이 해치울 것이다. 그리하면 ‘세계’라는 의복은 아주 찢어져서 아예 두 조각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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