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5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70) 경동교회의 재건 – 9ㆍ28 환도

[범용기 제2권] (70) 경동교회의 재건 – 9ㆍ28 환도


1ㆍ4후퇴로 부산에 내려갔다. 서울은 무인광야로 됐다. 강원룡은 피난지 부산에서 캐나다 유학의 길에 올랐다. 나는 환도 즉시로 경동교회 재건에 유의했다.

나는 우선 교회당을 지어야 했다. 설계도를 공짜로 그려다 주는 건축사가 있었다. 공지로 남아있는 고장에 예배당을 세우려는 것이다. 동란 중에 쓰레기통을 변모했던 그 고장을 주로 교회 부인들이 ‘청소’한다. 흙을 파낸다. 강원룡 후임으로 이상철이가 전도사가 됐다.

교회 건축 헌금을 했다. 예산 부족이다. 그때 서울태생으로 마포에 살던 김병문씨가 우리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상당한 유산자로서 실업인이었고 마포교회 장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업무상관계로 요정에 드나들기도 하고 소실도 두고 있었다. 해방되자, 그는 자기 사생활에도 근본적인 변혁이 있어야 하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기를 지도해 줄 수 있는 목사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를 굴러다녔다. 그러다가 경동교회에 낙착됐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앉아 예배만 보고, 다른 아무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건축헌금할 때에 그는 자원했다. “교인 전체로서의 헌금액수와 꼭 같은 액수를 자기가 담당하겠다.” 그러나 절대로 공개하거나 직책을 맡기거나 해서는 안되겠다는 조건부였다. 교회에서는 그렇게 약속하고 받았다.

그는 교회 가까이에 살아야 하겠대서 장충동에 일본인 부호가 살던 호화 저택을 사갔고 그리고 이사했다. 그 집 정원은 놀라웠다. 일본식 저택에 양옥도 한 채 곁들여 있었다. 그는 키 크고 젊잖고 위신이 깃들인 영국신사의 풍모였다.

환도 후 교회당 재건에 그의 공적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묵은 생활을 청산했다. ‘알레모니’로 많은 돈을 나눴다. 그는 장로 냄새를 내는 일은 없었다.

어쨌든, 경동교회도 재건됐다. 내부시설은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나 학생과 청년들이 가득하게 모였고, 제직들도 동지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나는 교인 ‘수’에는 별로 괘념(掛念)하지 않았다. 소수라도 ‘바탕’이 문제라고 보았다. 가정심방도 거의 못한다. 부흥회도 안 한다. 그 대신에 연속강연 또는 신앙강좌를 이삼일 계속한 일은 몇 번 있다.

불만한 교인들은 딴 교회로 간다. 가도 채근하지 않는다. “갈 사람은 가고 있을 사람은 있어라”다.

십일조 낸 사람, 특별연보 낸 사람을 회중 앞에 공개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이 아시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가르친다. 그대신 나는 창설부터 10년 동안 거마비 정도 받았다. 교인들도 내게 대해서 그런 것을 고려할 의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距離)에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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