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5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69) 경동교회의 재건 – ‘경동교회’로 노회가입

[범용기 제2권] (69) 경동교회의 재건 – ‘경동교회’로 노회가입


‘야고보교회’도 이제는 조직교회로서의 구조를 갖추었다. 창설당시에는 ‘당회’, ‘제직회’ 등의 구별이 없었고 모두가 한 ‘위원회’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로장립, 목사청빙 등의 절차가 필요하게 되자, 노회 가입 문제가 진지하게 토의됐다. 결국 노회에 가입 신청을 냈다.

노회에서는 교회 ‘이름’이 문젯거리가 됐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거의 전부 그 소재지 이름을 따 썼는데, ‘바울’이니 ‘야고보’니 하는 것은 너무 파격적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름’을 고치라는 권고가 내렸다. 그래서 ‘바울교회’는 ‘성’ 남쪽에 있다고 해서 ‘성남교회’로 되고 ‘야고보 교회’는 서울 동쪽에 있다고 해서 ‘경동교회’로 개명(改名)을 했다. 그리고서 노회에 가입했다.

처음 장립된 장로는 강원룡, 김영규, 김석목 등이었고 김능근은 원래가 장로였기에 이명해 왔다.

강원룡은 장로장립 때 김규식에게 축사를 부탁했다. 그래서 김규식은 처음부터 강단 바로 아랫구석 독의자에 앉아 있었다. 성남교회 송창근 목사도 순서에 들어 있었다. 좀 늦게사 도착했다. 현관에 발을 들여 놓자, 김규식 박사가 앞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송목사는 덜렁 핏대를 올리며 나가버린다.

“김규식이 교회와 무슨 상관이냐! 교회는 정치무대가 아니다. 덜 된 녀석!”

나는 “그러지 말고 들어오라”고 붙잡았지만 뿌리치고 달아나 버렸다.

강원룡은 해방직후에 진짜 정치에 나서려고도 했었다. 처음에는 이승만을 찾아 돈암장에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조향록, 이명하 등도 한 그룹이었다. 그러다가 이승만의 독재버릇에 실망하고 김규식에게로 갔다. 김규식은 영문학 전공이었기에 ‘인간성’이 경화되지 않았었다.

후에는 안재홍과도 가까이 지냈다고 들었다.

‘강’은 자기의 나갈 길에 대하여 내게 상담한다. 나는 말했다.

“지금 한국의 정치란 것은 물 위에 뜬 거품 같아서 변동이 심하고 수명이 짧을 것이다. 지금 어느 정치인에게 Commit했다가 그가 실각하는 때 너도 그와 운명을 같이할 것을 생각해 봐라, 앞길이 창창한데 첫 ‘데뷰’에서 ‘패잔병’이 된다면 계산이 안 맞는다…. 그보다도 ‘한신’에 들어와 신학을 공부하고 세계교회 무대에 나서는 것이 바른 길일 것이다….”

결국 그는 그렇게 했고 그렇게 됐다. 그는 경동교회에서 시작하여 경동교회에서 늙었다. 증자(曾子)의 ‘신종’(愼終)과 맹자의 계득(戒得)이 늙어가는 누구에게도 ‘좌우명’(座右銘)이 되야 할 것이 아닐까?

6.25때에도 나는 서울에 남았었기에 모두 피난간 다음에 ‘남은 부스러기’ 10여명을 데리고 예배를 계속했다. 우리가 도농에 강제 소개되었을 때에도 강원룡의 셋째 동생 강이룡(利龍)은 교회건물 안에 남아 있었다. 교회가 폭격당할 때 그는 교회당 현관에서 순사했다. 그가 아마도 제일 진실한 신자였을 것이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될 작정이었지만, 일찍 ‘승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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