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5일 금요일

[0307] 환란과 평화 / 1953년 5월

환란과 평화(요한복음 15:18~19, 16:2~3, 16:32~33)


(1953년 5월)

평화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주로 마음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환경의 영향이 큽니다만, 그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가져옵니다. 가령 체념한다 할 때, 그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체념하고 맘을 편안하게 하라 하는 것이라든지, 내적 균형, 즉 어렵다고 울고불고 하는 것은 수양 없는 소인들이 하는 일이니 큰일도 작은 일같이 여겨서 마음의 안정을 잃지 말라 하는 식의 금욕적 평온(stoic tranquility) 같은 것이겠습니다.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어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란 경지에서 도교적인 평화를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선도(仙道)라, 선인(仙人)이라 하는 분들은 이 방향에서 어느 정도 성취한 분들이겠습니다. 태연자약이란 태도도 그런데서 하는 말인가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태연하게 독배를 마셨다든지, 우리나라 어진 분들이 임금이 내린 독배를 절하고 받아 떨림 없이 마신 것이라든지 하는 것도 의리에 순하는 마음의 균형에서 가능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욕심을 제거한 무아 해탈의 평화는 더 높은 차원에서의 평화일 것입니다. 평화 자체도 기대하지 않는 평화이겠지요. 니르바나의 평화 말입니다.

한국 기독교에서의 평화도 위에 언급한 일반적인 평화 개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요동하고 소란하고 역습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이미 이 망할 세상을 뒤에 두고 영생 포구를 향해 떠났으니 내 마음 평안하다. 세상이여, 너는 네 죄 때문에 망할 것이다. 회개하고 나를 따라온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불심판을 받아 지옥에서 영원한 고초에 몸부림칠 것이다.”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의 초대 크리스찬들은 대개 이런 타입의 평화를 자랑했습니다. 사랑 없는 율법주의적 평화였다고 하겠습니다. 유대교라면 몰라도 크리스찬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평화 개념입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심리적 도피성이요, 기독교적 실재(reality)는 아닙니다.

원래 기독교의 독특한 점은 두 극성(極性)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크리스찬의 역설(Christian paradox)이어서, 그 진리는 변증법적으로 이해할 때에 비로소 근사치를 갖는다고 할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평화가 오고 전쟁 중이라면 평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평화가 있어서 비로소 전쟁할 자격이 있게 되는 것이고, 전쟁 중에 참 평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한 점에서 불붙으며 영원과 시간이 한 십자로에서 통해지는 신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평화와 세상의 환란의 ‘나’라는 한 점에 부딪쳐 동시에 실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환경이 즐겁고 평안하기 때문에 오는 화평일 뿐 아니라, 환경이 즐겁지도 평안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는 평화입니다.

그런데 ‘세상’이란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를 따져놓고 봐야 하겠습니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따지고 들면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이란 단어라 하겠습니다. 그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과 싸우기도 쉽고 이기기도 쉬울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물체라면 요새 원자탄 같은 것으로 부숴버릴 수도 있겠고, 그 승리를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란 우리와 일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실재입니다. 조웻(W. Jowett) 박사가 ‘세상’이란 말에 정의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세상이란 정신이며 혼의 태도다. 높은 사명 없는 생활, 높은 이상 없는 현실, 언제나 지평선만 보고 수직선은 못 보는 생활, 그의 행진 목표는 전진이지만 향상은 아닌 생활, 그 종점은 성공이요 거룩의 성취는 아닌 생활, 야망(ambition)은 있으나 흠앙(欽仰)은 없는 생활, 영적 임재 없는 지상적·세속적인 생활, 이런 것을 세상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환난, 영어로 ‘tribulation’은 본래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는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크리스찬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제 일차적인 충성을 서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신도들을 압박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새 크리스찬들은 현대의 물질문명에 따르는 물적 번영에 빠져 물적 생활의 안일을 우선적으로 즐기려 합니다. 그리고 그 안정된 질서 안에서 문화적으로 자라났기 때문에 기독교도 그 문화의 한 부분으로 다루려 합니다. 적어도 그것이 일반적인 ‘에토스’가 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적인 용감한 전투의식이라든지, 모험적인 충의심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무의미한 안일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는 결단적인 신앙행동은 증발돼 갑니다. 얌전하고, 신사적이고, 부정한데 접촉될까 두려워 옷자락을 치켜들고, 옆에 것은 안 보고 홀로 자기 길만 걸으려 합니다. 혹시 고난당한 이웃이 보여도 못 본 채 지나갑니다. 그것으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려 합니다.

예레미야는 말했습니다. “평화가 없는데 평화, 평화, 평안하다.”고 한다고 제사장들을 책망했던 것입니다.(렘 6:14) 공의 없는 세속적 ‘평화 판매 상’을 책망한 것입니다.

진실로 현대의 기독교는 전쟁 없는 평화, 의(義) 없는 안일, 욕 없는 영광, 죽음 없는 영생, 십자가 없는 부활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적인 평화가 아닙니다. 거짓 평화, 거짓 경건입니다. 불의와 타협하면서 원만이라 하고, 불법에 굴복하면서 건덕(健德)이라 합니다.

우리의 평화는 세상과의 타협에서가 아니고 세상이 주는 평화도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확신에서 생기는 평화입니다. 사실 이 하늘의 평화 없이 세상과 싸우면 일시 이긴다 해도 또 다른 세상 세력이 밀어닥칩니다. 진정한 평화 대신 평화를 표방한 싸움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역사란 그런 것들의 기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거대한 전쟁에서 적은 무리인 크리스찬이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서 그가 나와 함께 싸워 주시기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하고 그리스도는 선언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씻고 부활해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육신의 죽음이 옵니다만, 그것은 이빨 없는 사자 같아서 권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죄인으로, 죽음에의 승리자로 자유하는 평화,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능히 나를 정죄하겠느냐 하고 바울은 외쳤습니다. 이것이 참 자유하는 평화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평화인을 정복해낼 수 있는 폭력은 없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 말라.”고 그리스도는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몸으로 그것을 실증했습니다.

크리스찬은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수직선적인 화평을 맺었고, 그 화평이 옆으로 퍼져서 사회와 세계에 평면적인 화평을 펴는 것입니다. 그 화평은 사랑의 불꽃이기 때문에 악순환이 없습니다. 그 화평은 넘쳐흐르는 생명의 강입니다. 그 화평은 풀 자라듯, 꽃 피듯, 열매 맺듯 안에서부터 자라 밖으로 피어나는 산 평화입니다. 이 자연스러운 생명의 성장을 방해하는 해충과 질환과 폭풍우와 무지한 경작자 등 적대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사랑은 미움보다 강합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여도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크리스찬은 평화가 있기 때문에 싸울 수 있습니다. 싸웠기 때문에 승리의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평화와 전투가 한 점에서 작열하는 생활입니다.

댓글 1개:

  1. 많은 사람들이 자고 일어나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북미 정상회담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국민적으로 멘붕 상태에 빠져서 오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누가 평화를 이야기하는가?
    누가 환란을 조장하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적인 역학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1953년... 6.25 전쟁의 막바지에 휴전 회담이 오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장공 김재준 목사는 환란과 평화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평화를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환란'을 언급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역사와 정치 현실인 것 같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상황적 안정도 있지만... 인간 내부의 문제... 마음의 문제도 중요하다고 언급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외부적으로는 한국전쟁의 막바지였고... 교단적으로는 장로교의 분열의 상황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장공 김재준 목사... 솔직히 그런 상황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무척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크리스챤은...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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