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5일 금요일

[0451] 소망의 이유 / 1956년 12월

소망의 이유(베드로전서 3:13~18)


(1956년 12월)

지금 세기말적인 기운이 역사에 안개처럼 덮입니다. 사람들은 고뇌, 번민, 권태, 무의미 등으로 삶의 활력을 잃어갑니다.

젊은이들에게 꿈이 없고 백성에게 비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치니 경제니 할 것 없이 눈앞에 다가오는 사건만을 깁고 옭아매어, 그 대목만 넘기면 한숨 돌렸다고 안심합니다. 육신의 안일과 향락을 탐합니다. 무엇이든 긁어먹고 사는 날까지 고생 없이 살자는 식입니다.

‘혼’이 하늘에 통하고 ‘덕’이 이웃에 퍼져야 한다는 기독신자도 밤낮 우물쭈물하며 이런 풍조에 말려듭니다. ‘내가 왜 신자로 부름 받았는가?’, ‘내가 어떻게 해야 신자 노릇을 제대로 할까?’ 하는 각성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내용의 격문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1] 일어서라.

[2]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 너를 보게 하라.

[3] 그리고 당당하게 외치라.

기독신자는 숨어 지낼 수 없습니다. 일어서서 응전해야 합니다. 세속에 굴종하여 ‘바알’에게 무릎 꿇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상처럼 방석 위에 앉아 눈을 내리뜨고 생각에만 잠길 수 없습니다. 벌떡 일어서서 점호를 받아야 합니다.

무슨 선한 일이 있어 당신을 부를 때, 복음의 메시지를 위해 전령자를 부를 때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서야 합니다. 그것이 크리스찬의 기백입니다.

하나님은 행동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역사를 지어가는 행동의 종교입니다. 인간을 죽이는 행동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살리는 행동입니다.

사람들이 너를 보게 하라. 무엇을 보란 말씀입니까? 추태를 보게 할 것 입니까? 우둔을 보게 하랍니까? 추태든 우둔이든 숨기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으레 보고 비판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을 수 없다면 선행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랴.”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찬이 자기가 서 있는 고장에서 선행에 열심이라면 그 자체가 빛입니다. 일부러 눈을 감지 않는 한 누구나 보게 마련입니다. 한국은 개방된 자유국가입니다. 크리스찬이 각기 있는 분야에서 열심히 선을 행한다면 기독교와 기독교회가 해 받거나 욕볼 염려는 없습니다. 전도도 잘 될 것입니다.

당당하게 외치라. 우리에게는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전해드릴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경외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부르셨을 때 내가 ‘예’ 하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자인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공중에 매어달린 것처럼 우리 존재의 근거가 불안하고, 흔들리고, 종당에는 죽음에 삼킨바 되는 운명의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영생의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생의 기반이 섰습니다. 토프레디(Topledy)가 지은 찬송 <만세 반석 열리니>는 우리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 가운데서 영원한 진리를 찾았습니다.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진리를 먹고 삽니다. 자랍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율법과 선지자를 배우고 그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를 배우고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세계를 봅니다. 미약하지만 우리 속에도 그런 세계가 싹터 자랍니다.

우리가 시골 교회에 가보면 초대교회의 사랑이 지금도 그 심전(心田)을 축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것입니다. 일본인은 그렇게 영리하고 약삭빠르면서 왜 한국이나 만주나 중국이나 남양에 그 마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까요? 왜 히틀러는 그렇게까지 살벌하고 타민족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공산당은 왜 그렇게도 외곬이어서 기독교와 그밖에 여러 종교와 사상과 진리에 대하여 몰이해하고 배격과 숙청에 미쳐 있을까요?

그들이 좀 더 관용이 있고 마음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성공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의 수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기 비하면 미국은 보자기가 무던히 넓습니다. 끝까지 싸우면 이길 것인 줄 알면서도 어중간한 데서 멈추고 화친합니다. 원수였던 일본을 독립시켜 주고 먹여 주고 친구를 삼아 동지가 되게 합니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군과의 세력 균형정책 때문이라 하겠습니다만, 그렇다 셈치더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적 전통이 없었으면 그렇게 관대해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넷째로, 사랑의 실천은 집단을 요구합니다. 넓은 사랑은 넓은 대상을 찾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클수록 사랑으로 뭉쳐지는 큰 집단체, 사랑이 넓을수록 넓은 범위의 집단체를 만들려 합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사랑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생겼고 세계 교회가 생겼습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형제끼리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도 정작 그 속에 들어와 보면 그리 자랑할 것이 못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리스도 구속역사의 본류요, 하나님 나라의 교두보요, 세속 에 있으나 세속과 구별된 거룩의 장소요, 사랑의 샘줄이 닿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이렇게 서로 모이고, 납입고지서 없어도 자진하여 헌금하고, 서로 협력하고 받드는 것입니다. 어느 단체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이렇게 즐겁게, 이렇게 성실하게 수천 년을 그 생명 이 샘터에서 거리에로 끊임없이 흘러흘러 왕양(汪洋)할 수 있었습니까?

다섯째로, 우리는 이렇게 교회를 갖고 사랑의 공동체를 즐깁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 안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전 우주적인 속량사회 건설의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위한 전투 야영입니다. 우리의 무대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실직자처럼 비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 건설에 성실하면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걱정일 것입니다. 권태를 느낄 사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무대는 무한대로 크고 넓습니다. 사람이 봉사할 성의만 있다면, 봉사할 기회와 봉사할 장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봉사하는 것이나 청소부가 지하실에서 청소하는 것이나, 그 봉사의 바탕은 하나님 앞에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목사가 교회에서 설교로 봉사하는 것이나, 우체부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편지를 배달하는 것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봉사의 바탕이 같습니다.

할 일은 무한대로 많은데, 왜 할 일이 없을까요? 천국이 우리 것인데, 영원한 생명이 우리 것인데, 왜 우리가 무기력합니까? 성령의 감화가 없어서 그렇다고 할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사에 우리가 주체요,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무기력할 때 성령은 우리 속에서 무한한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예비했다가 대답해야 할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과 화목함을 얻었다. 성경에서 우리는 구원의 이치와 하늘나라의 메시지를 배웠다. 교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신도 각자와의 사랑의 생명체인 몸을 받았다. 이 신앙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진장의 일터를 발견했다. 그러므로 나는 믿고 배우고 서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을 하다가 내 주어진 시간이 다했을 때,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의 날개 속에 감추어진다. 나의 삶은 이러하다. 나의 죽음도 이러하다. 나는 그리스도 생명 안에서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안에 감싸여 살기 위해, 살리기 위해 영원히 산다.”

이렇게 증언하여 온유와 겸손으로 내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입니다.

댓글 1개:

  1. "인간이 희망이다"

    이것이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역사적으로 낙관주의를 주장하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생각이었다고 봅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던 무렵... 그 인간들에 의해서 '전쟁'(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그 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들은 정신을 못차리고... 냉전이라는 상황을 통해서 자신들의...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약소국은 침략과 수탈... 분단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냉전은 끝났다고 강대국들은 선언하지만...
    아직도... 한반도에는 냉전이 끝난 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당연히 희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문제는 생각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행동 속에는 인간의 생각과 이기주의적인 행동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과 같이 매일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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