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4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113) 5ㆍ16 군사반란(1961) – 환갑이자 퇴임한 ‘한신’ 학장직

[범용기 제2권] (113) 5ㆍ16 군사반란(1961) – 환갑이자 퇴임한 ‘한신’ 학장직


1961년 9월 – 군사 ‘쿠데타’ 직후 :

‘한신’ 만이 아니라, 모든 대학의 자치는 송두리째 지워져 버렸다. ‘지시’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지시’가 내렸다. 총학장중 만 60세 이상된 사람은 총사퇴하라는 지령이었다. 나도 9월 26일로 만 60세가 되는 판이니까 퇴임할 밖에 없다.

이 해는 내 환갑이래서 한신졸업생들이 발기해서 환갑파티를 학교에서 연다고 한다. 나는 환갑기분이 안나는 ‘장년’이어서 말이 날때마다 말렸지만 그래도 거저 있을 수 없다고 고집한다. 아들 셋이 있지만 아직 장가든 놈도 없고 모두 학생이어서 그럴 염두도 못내는 형편이었다.

위로 사위 셋이 있지만 역시 주역을 담당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래서 아마도 졸업생들이 서두른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신암교회 정용철 목사가 총무로 서무 재정을 도맡아 수고했다. 모든 졸업생이 자진협력했지만 역시 재정이 따르는 일에는 수월찮은 노고가 곁들이는 법이다. 환갑잔치 장소는 경동교회당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에 희미하다. 한경직이 축하했다. 잔치는 융성했다.

옛친구, 새친구, 같이 늙어가는 졸업생들, 자라는 재학생들 모두가 반가운 재회(Reunion)를 가진다. 그런 ‘기회’만으로도 일생에 한번은 있어 무방한 ‘연석’(宴席)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답사할 때 이런 얘기를 했다.

“환갑잔치란 수연(壽宴)이라고도 해서 오래 산 것이 경사스럽다는 잔치일 것인데 이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할 나로서는 닿는데가 없다고 생각되어서 늘 반대해왔었다. 그러나 이렇게 즐거운 재회의 날이 되고보니, 미상불 환갑도 할만하다고 느껴진다…….”

식사까지 끝내고 흩어질 때 경용의 말 -

“우리 자식들은 무엇인가! 아버님 환갑도 못해 드리고!”

조카 하용 의사가 환갑 때 입을 한복 일습을 진짜 공단으로 지어 한보따리 싸놓고 그날을 기다렸었다. 마침 내가 신촌 그의 병원에 들렀다가 떠날 때 그는 택시를 불러 모시게 하고 그 보따리를 내 앞에 같이 놓아주었다. 그런데 나는 학교구내까지 와서 그 보따리를 잊고 내렸다. 택시는 가버렸다. 내려서 집 현관에 들어오자 생각나서 두루 알아봤지만, 택시 번호도, 운전사 이름도 모르는 처지에 그런 것이 되찾아질 리가 없었다.

나는 조카에게 특히 조카며느리에게 너무 미안해서 말을 못하다가 결국 미안하게 됐다고 전화를 했다.

그들은 조금도 언짢은 기색이 없었다.

“저희 잘못이었어요. 저희가 갖고가 뵜어야 할건데 그랬어요……” 한다.

그들은 다시 한복 한 벌…… 바지 저고리, 조끼 마고자, 때, 대님까지 만들어 갖고 왔다.

그래서 한복차림의 의젓한 ‘늙은이’로 숱한 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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