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7일 수요일

[1865] 3ㆍ1운동은 진행형이다

[1865] 3ㆍ1운동은 진행형이다

3. 1운동은 독립 운동이나 정치 운동이기 이전에 진리 운동이었습니다. 북한의 공산 정권은 이 위대한 운동을 과소 평가하거나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3.1운동이 일제의 토지 겸병 정책에 몰려 소작권까지 빼앗긴 한반도의 농민들이 일으킨 농민 혁명의 하나라고 하거나 양반 계급의 역혁명 시도와 중산층에의 산업 정립을 그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그들의 우두머리인 김일성이 그 운동을 주도했다는 어불성설의 말도 늘어놓고 있습니다. 물론 3.1운동은 전민족이 참여한 대운동이었기 때문에 그 동기와 과정 속에 좌경화된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소작 쟁의도 연관이 되어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이 이 위대한 민족 운동의 주역이나 주목적이 아닌 것 또한 극히 자명한 사실입니다. 운동을 이끌어간 민중의 신념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에 항거한 우리의 내 나라 되찾기 위한 민족주의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3.1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그때의 독립 선언이 동서 고금을 통하여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위한 운동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데 그 의의와 가치가 더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제의 폭력에 의한 침략과 강점은 진리가 아니며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집단적인 폭력성이 여지없이 드러난 악행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일제의 군국주의적 침략이 한반도에서 성공하면 만주, 중국은 물론 동양 전체의 평화가 파괴되고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도 보장할 수 없으리라고 독립 선언서 위에 명확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조선의 독립 선언은 역사 전반에 대한 예언 운동이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일제라는 광망한 악동(惡童)은 듣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유아독존적인 도취에 빠져 교활한 술책과 총칼로써 만주를 삼키고, 나아가 중국의 전토를 꿀쩍하고자 했습니다. 끝내는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허울좋은 야욕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가 자국의 젊은이는 물론이고 한국의 죄없는 젊은이들을 정병, 정용 정신대 등으로 끌어내어 남태평양의 푸른 물결과 사할린의 차가운 눈보라 속에 인간에 불과한 천황의 이름을 위해 묻었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을 상실한 일제가 발악을 했지만 오래갈 수는 없어 1945년 무조건 항복을 했습니다. 그래도 기독교 윤리가 상식화한 미국에 먹혔기에 그만큼이라도 명맥이 유지된 것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나 38선으로 허리가 잘려서 이북은 일인 공산독재 체제로, 이남은 이승만의 장기 독재, 박정희의 군사독재로 이어지고 현재에도 파행적인 체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은 인간 자체로서의 행복한 삶이 그대로 부정되었습니다. 국민 일반의 운명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한 사람의 독재가 얼마나 큰 죄악으로 점철되는지 히틀러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미친 짓거리로 말미암아 6백만의 유대인이 죄없이 학살되었고, 세계가 전쟁과 살육의 폭풍 속에 휘말렸던 것입니다. 그가 미친 개였는지, 미친 호랑이였는지는 몰라도 미친 것만은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뒤틀린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국민으로서의 주체 의식을 강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인간만이 주체적인 사회를 만듭니다. 그것이 민주 사회요, 민주 국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민족 주체 의식이 유약한 것 같습니다. 고구려는 예외일지 모르겠습니다만 통일 신라 때부터는 당나라의 변방 노릇밖에 못했습니다. 만주라는 광활한 영토를 이적(李勣) 등에게 바치고서 이룬 통일이란 것이 다 무엇입니까? 그래도 한 국가로서 명맥은 유지해야 하겠기에 “적응하면서 반항한다”는 양면 정책을 썼습니다. 약소 민족이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생존하려면 그런 지혜를 쓸 수밖에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천 년의 역사를 엮어 오는 가운데 우리 민족의 주체성은 약화되고 비겁해졌습니다. 결국엔 나라가 망했습니다. 8.15에 광복은 되었지만 허리가 잘렸습니다. 38선, 휴전선을 사이에 둔 채 초강대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습니다. 그 해방의 날은 예견하기 어렵습니다. 그 옛날 신라가 겪던 어려움, 대한 제국 말년에 외국으로부터 몰아친 태풍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맹렬한 외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국은 자칭 민주 진영의 맹주(盟主)인 미국의 산하에서 유치장 공기통만큼이라도 하늘로 통하는 들창이 열려 있지만, 김일성 신화(神化)의 북한은 유물론적 무신관 속에 우상으로 가득한 동토(凍土)가 되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확신합니다. 정의와 진리가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의 진리는 내가 말하는 진리가 아니고 하느님이 선포하신 계명이요, 진실입니다. 그것은 남을 죽임으로 내가 산다는 것이 아니고, 남도 살고 나도 사는 진리입니다. 3.1운동은 진리 운동입니다. 일본도 살고 한국도 사는 진리 선언이었습니다. 교회인은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진리의 증언자이며, 진리의 생활인입니다. 3.1운동은, 우리의 민족혼이 그리스도의 혼 속에 스며들어 한국에 그리스도적인 새 민족혼을 창조 또는 성숙시키는 산고(産苦)의 기록입니다. 전쟁의 신 마아스에게는 총칼로 핵무기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리와 정의가 있습니다. 옛날 세계를 뒤흔들던 진시황이 어디 있으며 징기스칸이 어디로 갔으며, 히틀러와 스탈린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피와 죽음으로써 절대적 권력을 누리던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들이 누운 한 평도 되지 못하는 차가운 땅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열 두 제자를 데리고 죄인을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죄없는 죄인으로, 죄인을 대속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주(主)로 높임을 받습니다. 그의 제자는 열 둘의 소수였는데 그 중 한사람은 배신자였습니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며, 외롭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만도 전 인구의 4분의 1인 1천만이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긴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이 삶에서 죽음으로 그 호적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죽음의 호적부에 옮기지는 못합니다. 그는 영원히 살아 생명의 주로 일하십니다. 3.1운동과 그 정신은 그리스도 윤리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교회가 3.1절을 성일(聖日)의 하나와 같이 기념하는 것은 한국 민족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역사로 승화시키는 성업의 표시입니다. 3.1운동은 진리의 외침이며, 3.1정신은 진리의 선포이며, 그 시위(示威)는 진리의 진군입니다. 그러나 3.1운동은 과거의 유물이 아닙니다.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38선이 휴전선이라는 것으로 이름만 바뀐 체로 여전하며, 북한에는 지상 최대의 폐쇄적 공산 독재 속에 우리 민족의 일부가 신음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독재 정권의 연속 속에 국민의 주권과 자유가 유보되고 있습니다.

“그대들에게 총칼이 있느냐?”, “우리에게는 진리가 있다”, “진리가 무어냐?”, “내가 곧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라고 그리스도는 대답하십니다. 3.1운동은 진리 운동입니다. 역사에 종말과 완성이 올 때까지 3.1운동은 진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가장 학생 청년회 3.1절 기념 예배에서
1986. 3. 4

댓글 1개:

  1. 1986년...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돌아가시기 1년 전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과 학생들이 마련한 3.1절 기념예배에서 "3.1운동은 진행형이다"라는 강연을 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은 진리에 대해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확신한다면... 그것을 위해서 전진해야 한다!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는 이런 관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 필요하다'
    '이런 활동을 하면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 보겠지?'
    '적어도 지성인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드러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럴듯하게 명분을 만들어 포장하고, 그 속에는 무언가 탐욕과 이기심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은 순수함으로 출발했지만... 도중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이익들(사람들의 관심, 물질적 후원, 명예 등등)에 집착하는 모습은 아닌지... 이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적당한 자기 합리화(누이 좋고 매부 좋은거 아니야? 나 혼자만 잘먹고 잘살기 위해 이러는 거 아니지...)로 포장합니다.

    최근에...
    민주화 운동을 위해 노력한 교단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한국기독교장로회'가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습니다. 왜 이런 느낌이 들까요?

    진리의 측면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사업'의 측면으로 접근한 것 때문이 아닐까요? 그 옛날에는 배고프지만 보람이 있었고, 나름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적은 수가 모여도 진리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결코 적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에 적은 수를 아쉬워하게 되고, 물질의 풍부함을 동경하게 되면서... 진리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사업을 확장하려는 기술을 연마하려는 모습이 우리 안에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기장이기 때문에 이 정도는 해야 한다!"

    이런 강박관념은... 영혼 없는 주장이 되고... 결코 그 하는 일에 대해서 지지와 설득력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비판하는 그룹의 사람들은 드러내서 자기 욕심을 채웁니다. 그들에게는 솔직함이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그 진리 편에 설 것인지... 깊은 고민을 하는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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