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7일 수요일

[1864] 3ㆍ1운동은 사랑의 진리운동

[1864] 3ㆍ1운동은 사랑의 진리운동

창세기 1장에서 2장 3절까지와 2장 4절에서 2장 25절까지에 인간 창조의 설화가 있는데, 위의 것은 제사 문학에 속하고 아래의 것은 엘로힘 문서에 속한다고 일컬어 왔습니다. 엘로힘 문서가 훨씬 오래 전에 쓰여진 것임은 공인된 사실이겠습니다.

이 두 문서 중에서 남자와 여자의 문제를 우선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이른바 “P문서(Priestly Code)”인 창세기 1장 26절-28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둘 다 하느님의 형상이고 그 권리도 동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생식과 자연 개발과 해양 개척, 그리고 우주 정복까지 모두가 인간 즉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오늘날의 남녀 동등권 주장은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종교적 근거에 심어져있는 것입니다.

둘째, 남자와 여자의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는 동등하지만 그 몸의 구조는 똑같지 않습니다. 후손 번식을 위한 생리 기관이 다릅니다. 남자 없는 여자나 여자 없는 남자는 정상적인 인간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자연이 아름다와도 그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J문서(jahwist)”대로 본다면 아담을 깊이 짐들게 하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잘라 내어 그것으로 여자를 만들어 아담의 옆에 나란히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상징적인 표현이겠습니다만 상징하는 진리는 오묘합니다. 갈빗대는 가장 중요한 내장들을 외부로부터 보호합니다. 그 중의 하나를 재료로 여자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우선 그 재료가 훨씬 더 아름다고 문화적입니다. 아담은 진흙으로 만들었기에 거칠고 울뚝불뚝한 성질이 강해서 주로 사냥이나 전쟁을 하는 데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아름답고 문화적이고 그 재료가 고급이니만큼 그 혼도 세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싸워서 죽이고 다치게 하지만 여자는 그 상처를 낫게 합니다. 지금은 여자들도 전장에 나가 고급 장교도 합니다만 그래도 전장에서의 여자의 역할은 주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고 낫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백 살에 낳았다는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 제단에 올려놓고 “네 이 칼로 외아들 이삭을 잡아 내게 번제물(燔祭物)로 드려라”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외아들 이삭을 제 손의 칼로 죽인다! 그것도 아무 죄도 없는 순진하고 암전한 소년을! “차마 못할 일이다”하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원망하며 하느님께 대들었을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물며 어머니 사라의 마음에야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장차 자신의 외아들을 인간 구원의 번제물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려는 경륜의 계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리아산의 사건에서 아브라함의 믿음보다도 독생자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 없는 자녀, 아내 없는 가정은 사막과 같아서 삭막하기 그지없습니다. 여성의 희생과 사랑에서 가정이 삽니다. 가정을 살리는 여성들에 의하여 사회가 살고 나라가 살며 나아가 세계가 움직입니다. 한 가정을 예로 들어도 여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가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다 주어도 어머니가 잘 건사하지 못하면 항상 쪼들립니다. 반면 그 돈이 적어도 어머니가 규모있게 쓰면 부족하지만 잘 꾸려 나갈 수 있습니다. 아내의 존경을 받는 남편이 남들로 부터도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남의 사랑도 받는 것입니다. 여자가 어머니, 아내의 역할을 충실히 한 가정이 평화롭고, 그 위에 사회와 국가도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자의 희생과 사랑이 우리 사회 속에 전면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3.1운동이라 하겠습니다. 3. 1운동은 환단 고대로부터 내려온 6천년 역사 속에서 꾸준히 지켜 온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을 되찾는 운동이었습니다. 2백만의 나라 잃은 백성들이 잃은 나라를 되찾고, 자유를 회복시키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거족적이어서 국내와 해외, 남녀 노소, 사회 계층 등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참여한 운동이었습니다.

조선 독립 만세라는 외침이 산울림이 되어 퍼집니다. 그 영악한 일제의 주구들의 의표(意表)를 찔렀습니다. 기마대가 달립니다. 총알이 날고, 칼날이 번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비무장입니다. 애국 애족의 마음과 도의 사회 건설만이 우리의 절규였습니다. 미친 개가 선불 맞은 것처럼, 총칼을 든 일제의 주구들은 총을 쏟다. 칼로 찌른다, 벤다, 목을 매단다 하고 미쳐 날뛰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한국 민족이 피를 흘렸습니다. 교회당은 불에 타오르고, 교인들과 철모르는 아이까지도 불에 타죽었습니다. 3.1운동은 민족의 번제물이었습니다. 3.1독립 선언이 그렇게 비밀리에, 그렇게 빠르게, 그렇게 광범위하게 전달된 것은 비교적 일경의 눈에 띄지 않는 늙은이나 어린 학생, 부녀자들의 지혜로운 운반 수단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그때까지 가정 속에 숨어있던 여자들이 가정을 벗어나 그 잠재적 역량과 아울러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남김없이 분출시킨 것은 3.1운동의 의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1독립 운동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3.1운동은 진행형입니다. 8.15는 독립의 완료형이 아니고 진행형입니다. 38선은 한국의 허리를 잘라 전선 불수의 병자로 만들었습니다. 한민족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그들의 이해(利害)에 따라 38선을 그은 미국, 소련과 같은 초강대국들은 38선을 휴전선으로 이름만 바꾼 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남한의 천자라도 된 듯 착각하고 남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고 간섭합니다. 북한은 이름 그대로 위성국입니다. 남한이나 북한 모두 강대국의 경제에 종속되다시피 한 종속 경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한이 북한에 비해 그 정도가 덜한 것도 사실이지만 미국과 일본과의 경제 관계에 그 목숨줄이 매달려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북한이라는 극단적 파괴주의자들과 맞서 남한의 자유 민주주의가 유보되고, 사회 전체가 질식할 듯한 분위기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의 폐쇄 사회화는 자살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군데에 열린 들창이 있어야 사회가 질식을 변하고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한의 자유 민주화는 불가피한 추세입니다. 그 추세를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북한의 군사적 남침이 없는 한에는 군사 독재는 그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소련과 미국이 수탉 싸우듯 눈을 붉히지 않는 한 38선이 존재할 근본적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 냉전의 산물인 38선이 휴전선으로 변한 채 그 장벽의 높이와 두께만 더해 가고 있습니다. 휴전선은 완화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남한에 피난해 온 이북의 실향민들은 휴전선을, 전쟁을 잠시 멈춘 선이 아니라 영원히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선으로 바꾸는 데 앞장을 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북한을 공산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변혁시켜야 하겠습니다. 그것도 무력에 의해 할 것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에 의하여 이룩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남한에 자유 민주주의의 확고한 주춧돌을 마련하는 운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곧 3.1운동의 연장임과 동시에 민족의 삶을 위해 기독교 단체에서 육성해야 하는 사랑의 사업일 것입니다.

일제하에서 독립 운동이라는 형극의 길을 걸었던 애국 지사들이 처자를 고향에 둔 채 만주, 시베리아, 중국의 상해와 중경, 미국의 하와이와 로스엔젤레스 등에서 유랑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그 어린 것들을 손목을 잡고 등에 없고 행상을 하면서, 일제의 온갖 감시와 학대 속에서도 말없이 남편이 할 일까지 도맡아 감수한 어머니들을 3.1절 오늘에 모르는 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남한에서는 독재 정치, 재벌들에 의한 독점 경제, 젊은 여공이나 일일 육체 근로자들의 비참한 저임금, 농촌의 황폐화와 농민의 수탈과 같은 일들이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치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떠듭니다. 교회에서도 어떤 교파에서는 인권 운동에 열심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교회 이기주의에 빠져 자기들만의 울타리를 쌓고 세상과는 인연을 끊으려 합니다. 그것은 3.1정신도 아니고 기독교 정신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3.1정신은 민족의 부활을 위하여 독립 운동의 십자가를 지는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상에서 3.1운동은 진행형이라고 했습니다. 과거가 아니고 현재이며, 동시에 미래에의 행진이란 뜻입니다. 정치적으로도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이루기 위해 행군하는 중입니다.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나아가는 중입니다. 경제적으로도 외채 번영이라는 중병에 빠져 있습니다. 사상적으로도 명백하지 못합니다. 북한에서 “우리는 공산주의를 국시로 한다”하고 나서는데 한국에서는 “반공을 국시로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뜻일 텐데,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이 국시라고 할 때 “만일 공산주의가 없으면 너희 국시는 무엇이라고 할래”라는 반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자못 곤혹스럽습니다. 군사 독재를 국시로 할 수도 없고 파시즘을 국시로 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가장 떳떳하고 바른 대답은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국시로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헌법에는 엄연히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놓고 민주주의를 하자는 국민을 죄인으로 잡아간다면 이보다 더한 모순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 미친 것으로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마왕(魔王)을 내쫓고 사귀(邪鬼)에게 “물러가라”고 호령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인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아주 유약합니다.

기독교의 여신도들께서 하느님의 희생과 사랑을 받침으로 한 용기와 신념을 갖고 어머니로, 아내로 살아간다면 그 가정이 튼튼해지고 나아가 사회, 국가가 바르고 밝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그렇게 될 때 3.1운동은 오늘에 그 의의가 더해져서 되살아날 뿐만 아니라 미래를 향한 힘찬 발걸음은 더욱 힘차고 빨라질 것입니다. 그럴 때면 자유 민주주의의 밝음이 예수님의 사랑과 더불어 빛날 것이며 통일도 완수될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는 무엇을 하느냐! 남자와 여자는 동등이고 한 몸이 되었으니 같은 의무를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 하는 일이 분업적일 것뿐입니다. 3.1운동 때에도 물론 그러했습니다.

여신도 서울 연합회 강연에서
1986. 3. 1.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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