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6일 화요일

[1109] 새 세기의 예언 - 3ㆍ1정신

[1109] 새 세기의 예언

- 3ㆍ1정신 -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 (눅 4:18-19)

이것이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후 고향인 나자렛 회당에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메시지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 한국 사람은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합니다. 특히 나라가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 백성이 되었을 때, 정치니 경제니 문화니 교육이니 하는 것이 모두 일본 사람을 위한 것이었고 한국 사람은 그것을 위한 방편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정치적인 압박과 경제적인 착취와 우리 문화의 말살과 역사의 날조 등으로 우리 민족을 물질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극빈자가 되게 했습니다.

「너희는 못난 인간들이다.」 「민족적으로 열등하다.」 우리가 무엇을 주장하면 「뭐야, 건방지게, 죠센진(조선인)이 무슨 잔소리냐? 입 닥쳐!」 하는 것이 당장 나오는 욕설이었습니다. 가난이란 것은 「돈이 없고 먹을 게 없는」 환경적인 상황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때, 그 인간적인 가난은 가장 비참한 가난입니다.

예수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빵만을 배불리 먹이면 된다」는, 돌로 먹을 만들어 먹이면 통치자의 구실을 다하는 것이라는 따위 유물론적인 경제제일주의가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의 열등감과 자학적 심리를 씻어버리고 인간적인 위신과 존엄과 긍지를 회복시키는 것을 근본문제로 삼은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하느님의 자녀다. 너희는 가난에 눌려서 인간됨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의 말대로 하면 「하느님은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약 2:5) 한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하느님의 말씀을 먹지 못한 인간은 권력을 가지면 맹수형이 되고, 재산을 가지면 꿀돼지형이 됩니다. 그것은 무서운 인간 빈곤입니다. 이런 타락자, 상실자들에게 인간 회복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예수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가 3ㆍ1독립 선언문을 읽어보면 우리 민족의 독립이라는 정치적인 선언이기 전에 우리 민족의 인간 선언이었고 윤리 선언이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예수는 「포로된 자의 해방과, 눌린 자의 놓임과, 눈먼 자의 보임」을 선포하고 결론으로는 「주의 복된 은혜의 해를 가져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에 대하여 여기서 번거롭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 사람의 인간성 자체 속에서 지금도 못견디게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경험하고 있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눈먼 자를 보게 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문자 그대로 소경을 보게 한 예가 여러 번 있었읍니다만, 그것만이 아닌 줄 압니다. 이 말씀은 요샛말로 한다면 「의식화」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피압박자요 노예화한 자요 인격상실자이면서도 그것을 그렇게 의식하지 못하고 싱겁게 부풀어서 스스로 잘난 체 합니다. 오히려 자기가 유일한 메시아인 줄 압니다.

인간 특히 권력에 도취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맹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의 정체를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그렇잖으면 한 사람 때문에 수천만의 인간이 피해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그런 역사적 사실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일반사회에서도 이런 부류의 맹인은 수없이 많습니다. 자기만 보고 이웃을 보지 못하는 인간, 돈만 보고 사람을 보지 못하는 인간, 자기 민족만 보고 다른 민족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 웃사람만 보고 아랫사람은 볼줄 모르는 맹인, 전체만 보고 개체를 못보는 눈, 권력이 눈 앞을 바싹 가로막아서 그것 밖에 보지 못하는 인간군, 붉은색 밖에 못보는 색맹 – 등 갖가지 「눈먼 자」가 득실거립니다. 예수는 이런 인간들의 눈을 뜨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보다도 마감 결구가 더욱 중요합니다.

「주의 축복된 해를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낡은 세기를 올려보내고 온전히 「새로운 하느님의 메시아적 세기를 도입한다」는 선언입니다. 나는 우리 나라에서의 3ㆍ1정신의 가장 핵심적이고 위대한 점이 또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보라 신천지가 눈 앞에 전개되었다. 위력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온다.」 그러므로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얽매인 일본의 위정자들은 각성하라」하는 것입니다.

침략주의, 강권주의는 억년묵은 악마의 이빨입니다. 이것이 철저하게 변질되기 전에는 「인간화」운동은 보편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신천지 , 새 시대의 질서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강력주의 아닌 도의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전세계 역사는 강력주의 정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소위 power politics가 세계사의 지반이 되어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정치는 힘이다.」 「강제력 없이 정치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정치의 ABC라고 합니다. 국제적으로도 「힘의 균형」만이 평화를 가능케 한다는 것입니다. 힘의 균형이 깨어질 때 거의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전세계 국가들이 집단적으로 안전을 보장하자고 해서 국제연합이 생겼습니다만, 강대국들이 협조하지 않는 한 UN은 무력합니다. 예수의 윤리에서는 강력정치 power politics가 아니라 「사랑의 정치」가 주창되고 있습니다. 잃은 양 하나를 찾아다니는 목자,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의 모습이 예수의 모습임과 동시에 지도자 통치자의 모습입니다. 지배자가 아니라 봉사자가 으뜸가는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3ㆍ1정신은 새 세기의 탄생을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강력주의의 낡아빠진 맹수형이 아니라, 도의와 사랑의 인도적인 세기란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 인류평등, 국가독립, 국제공존을 선포하고 거기에서만 세계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요, 새 시대의 요청이요, 민족발전의 자유로운 과정이요, 세계문화에의 창조적인 공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감으로 「양심이 나와 함께 있고 진리가 나와 함께 간다.」 「이 정신, 이 운동을 좌절시킬 아무 권력도 있을 수 없다」고 일종 종교적인 확신을 선언했습니다.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합계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실지로 전국 방방곡곡에 퍼지게 된 것은 각 지방 교회들이 그 거점이 되어 활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 중의 교회당에 일본 군경이 불을 지르고, 나오는 교인을 모조리 학살한 제암리 교회 사건은 그만큼 교회가 3ㆍ1운동의 거점이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선언에서는 강력주의, 침략주의에 대하여 다만 「아니요」하는 한 마디를 외친 것 뿐입니다. 아닌 것을 아니오 하고 고난을 감수한 것입니다. 무저항적 항거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25년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이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양심으로 심은 의의 씨는 반드시 싹트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하고 바울도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말했습니다.

[1974. 3]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