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6일 화요일

[0814] 신을 상실한 유다 – 3ㆍ1절 50주년

[0814] 신을 상실한 유다 – 3ㆍ1절 50주년

우리는 어제 50주년 3ㆍ1절을 경축했다.

3ㆍ1절의 외침도 이제 반세기 전 이야기로 되었다. 아무리 시간의 봉우리가 겹겹으로 높아도 그보다 높은 태양 빛을 가리지 못하는 것처럼 3ㆍ1의 빛은 시간을 넘어 오늘에도 환하게 비추인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는 진실로 회개해야 할 나라, 우리 역사는 회개하는 눈으로 봐야 의미 있는 역사다.

지리적으로 볼 때 우리 나라는 대륙과 해양국 두 나라 틈에 끼어 가장 중요한 위치면서 가장 위험한 고장이 바로 우리 나라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려면 모두가 한데 뭉쳐 똑바른 정신으로 밖을 살피고 안을 굳혀 아무도 얕보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세의 역사를 보면 당쟁과 또 쇄국 정책 아래 양반들은 늙고 혼미해서 아랫목에 앉아 움속같은 작은 방안 밖에 보지 못했다.

적은 밖에 있는데 자기네끼리가 적인 줄 알고 서로 물고 뜯으며 싸웠다. 당파싸움이란 것이 도대체 나라 경륜에 무슨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지각없는 그들은 정권에만 눈이 어두웠다. 임진 왜란을 앞두고 선견지명이 있었던 이율곡 선생의 십만 양병책도 태평성세라는 아랫목 늙은이의 감각 때문에 실없는 소리로 되어 버렸다.

임진왜란은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때린 최후의 경고였다. 일본한테 그렇게까지 죽을 뻔하다가 살아 났으니 이제 좀 정신 차리겠지 - 이렇게 기대하는 마음은 누가 생각해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병이 골수에 사무친 양반들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구약에 나오는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나라 형편과도 같았었다. 그 귀절을 보면 외국인이 그 힘을 먹었으니 그는 그런 줄도 모른다. 백발이 머리에 늘어가도 그것도 모른다. 그는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애굽에 가 불러보고 다시 앗수르에 가 본다. 그래서 이 혼미한 이스라엘은 어느 사자의 밥이 된다.

임진왜란 때 일본 때문에 그렇게 곤고를 당했었으면 그 후에는 깜짝 놀라 그 경각심에서 나라 살림을 재건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임진왜란을 통해서 최후로 경고한 것을 듣는 귀가 없었으니 마이동풍이 되고 말았다. 이조 말기 누구나 침략할 수 있었던 우리 나라 형편을 알고 청국과 일본, 노국과 일본 - 이렇게 맹수들은 제가 먹으려고 싸웠다. 그러나 우리 양반들은 그런 줄도 몰랐다.

그래서 결국 맹수들 싸움에서 이긴 일본이 그럴 듯한 명목을 내세우고 먹어 버렸다. 나라를 잘못 건사한 양반, 나라를 팔아 먹은 양반들도 나라와 함께 자기도 먹힌 운명을 늦게나마 깨달았기를 바란다. 그때 2천만 국민도 물론 나라와 함께 주권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각기 돌맹이를 안고 먹혔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뺏기지 않은 돌맹이가 소화될리는 없다. 그래서 먹은 자들은 자기 배가 아파서 발광을 했다.

한국은 언제나 국민이 지켜왔다. 고위층은 졸렬하고 부패해서 제 백성을 정신없이 짓밟고 수탈해도 짓밟히고 뺏기는 국민은 그래도 나라의 밑바닥에서 끝까지 버티며 적과 싸웠다. 임진왜란 때에도 자원 출전한 민병들이 나라 체면을 세웠다. 더 옛날 - 천하를 석권한 몽고의 침략에서도 우리 국민은 끝까지 항거했다. 나라는 망했어도 국민은 그 변변한 민족얼을 품고 끝까지 살아 움직인 것이었다.

1919년 3월 1일 - 일본이 이 나라를 통채로 삼킨지 10년 - 차돌을 품고 일본의 창자 속에 들어 간 우리 백성은 거기서 살아 발버둥을 쳤다. 일본은 터지는 창자를 안고 몸부림쳤다. 만세의 고함소리는 - 달리 생각하면 못 먹을 것을 먹고 신음하는 일본의 절규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천만 민족정기의 폭발을 솟뚜껑으로 막을 수는 없다. 인간 정신의 증기가 폭발점에 이르면 화산처럼 퍼지는 것이어서 그 위에 세워진 대제국도 파편 같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총도 칼도 곤봉도 없이 다만 정의와 자유와 민족혼만으로 외친 3ㆍ1의 함성은 3천만 민족 정기의 폭발이었다. 그 소리가 메아리쳐 해마다 민족의 혼에 울려 27년 마침내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의 아성은 와락 무너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함성에 아멘의 응답을 들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교회의 순교자들도 같은 원리를 걸은 것이었다. 3ㆍ1의 희생자들은 나라의 순교자들이었다. 그들 위에 이 나라가 다시 선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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