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0일 목요일

[범용기 제6권] (1639) 산자의 하나님

[범용기 제6권] (1639) 산자의 하나님[마태 22:23-33]
- 부활절 예배에서 -

예수 당시의 유대교 지배계급에는 두 파의 교권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계급의 사두개파요, 하나는 각 지방에 있는 유대교회당의 장로와 신도들에게 뿌리박은 바리새파와 율법교사 그룹이었습니다. 예수를 살해하려고 음모를 진행시키는 데는 둘이 서로 협력했고 정치권력자인 헤롯왕도 이에 끼어들었고 로마에서 파송한 총독도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결국 예수를 국가반역죄로 몰아 사형언도에 표를 던졌습니다.

예수는 이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억울한 사형에서 그를 구출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어느 한 사람에게도 구명운동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참인간” 즉 범죄 이전의 하느님 형상 그대로의 인간이라고 믿었습니다. “인자”는 “메시야” 칭호로도 사용된 바 있기는 합니다만(다니엘 7:13 – 사람의 아들 같은 이), 보통으로는 “인간”, 특히 “연약한 인간”으로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하느님의 형상” 자체로서의 존재기 때문에 “하느님 아들”이라고 자기를 규정했습니다. 그가 하느님을 “내 아버지”라 부른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우는 것과는 구별되는 본체론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바울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범죄 때문에 왔다면 범죄 이전의 인간, Prototype으로서의 인간에게는 죽음이 권세를 부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들인 그는 흠 없는 하느님 이미지일 것이므로 그에게는 본래적으로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므로 하느님 “이미지”로서의 인간도 죽을 성질의 것이 아닐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육”의 몸에만 작용하는 것입니다. “영”도 자신을 표현할 방법으로 몸으로 나타납니다만, 그것은 “영체”요 “육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의 질서에 속한 것이요, 자연질서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타락”이란 것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스스로를 절연한 결과로 영의 질서에서 자연질서에로 “추락”(Fall)한 상태를 말함이라 하겠습니다.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 다시 나야 하겠단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하고 예수는 말씀했습니다.

“다시 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난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육”은 자연질서의 소속이고, “영”은 영의 질서에 속한 것이므로 영생은“영으로 하늘의 질서에 들어간 때”에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인간이 부활한 몸을 입을 때에는 “영의 몸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한 몸은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형상”이 인간에게 원형 그대로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한 예수를 “처음 익은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사두개 사람들은 현재의 추락된 인간실존이 인간 존재양식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Lecerate Marriage라는 원시적 결혼습속을 예로 들어 예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모세가 정해준 법에는, 어떤 사람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웃에 칠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결혼을 하고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됐는데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째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이 다 죽은 뒤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칠형제가 모두 그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는 그 여자는 누구의 나내가 되겠습니까?”(마태 22:24-28 공동번역)

예수님은 즉석에서 대답했습니다.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본 일이 없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삭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란 뜻이다.”(29-33).

질문자들이 모두 감탄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은 그리 복잡난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한다는 것은 “하느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그 원형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조건에 지배되지 않는 “몸” 말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한다면 “죽음이 삶에 삼킨 바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죽음아, 네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예수의 생애와 사상은 어디까지나 삶이요,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살되 영원히 산다는 “영생”을 선포했습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죽으러 올라가실 때,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돌아갔습니다.

예수가 열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하는 길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인간은 어디까지나 살기 위해 사는 것이요,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죽는 것도 살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죽어도 살고, 죽어서 살고, 죽으며 사는 것입니다. 산 자길래 산 하느님을 믿으며 사는 것이고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죽을 바탕을 그 존재 속에 갖고 있지 않은 인간, 말하자면 “죽음에 이르는 병”을 그 본성의 “핵”으로 지니고 있지 않은 인간, 죄없는 인간, 또는 죄를 용서받은 인간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인간을 “부활”의 인간이라 부릅니다. “죄” 대신에 “의”가 지배하는 인간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까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의롭게 했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이 옳게 여기시는데 누가 감히 그를 죄인이라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으로 아브라함의 삶을 인도하고 아브라함이 죽어도 하느님 품에 감추어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대를 이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이 “이삭”의 하느님으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하나님이 되고, 또 영원히 하느님 안에 그를 간직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이 이삭의 대를 이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살아있는 인간이 참 삶을 살게 하는 하느님이요, 죽은 다음에 “사후처리”나 해주는 “장의사”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부활신앙이란 인간을 살게 하고 살되 풍성한 생명으로 살게 하는 신앙입니다. 인간을 더 자유롭게, 의롭게 살게 하는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내포한 삶을 사는 인간을 만드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 죽을 몸 속에 하늘 씨앗으로 심어져 싹트고 자라고 열매맺어 백배 천배 풍성한 생명으로 발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세계, 범죄와 암흑의 세계, 저주와 증오와 불법과 탄압의 세계를 거룩한 생명으로 덮어주는 푸르름의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부활절이 사막에 번홍화같이, 메마른 마음에 주단을 펴는 생명의 사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980년 부활주일
일본동경 사와사끼 교회에서

댓글 1개:

  1. 우리가 갖고 있는 '부활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만이 기독교의 진리이고 부활신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가 호흡하면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사후 세계에서 대접을 잘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라... 그 삶 자체는 그것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재준 목사는 부활절 설교를 통해서 인간은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사는 존재라고 강조하고 있다. 올바른 부활신앙이 있어야 올바른 기독교 공동체를 양육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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