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7일 목요일

[범용기 제6권] (1640) 우리의 자랑

[범용기 제6권] (1640) 우리의 자랑
[고린도전서 1:14-31, 갈라디아서 7:14]

사도 바울을 “성 바울로”라고 부릅니다. “성자인 바울”이란 말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성자”로 불리우는 것을 좋아할런지는 의문입니다. 그는 적어도 중세기적인 Saint로 취급받기에는 너무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를 “사도”라고 불러준다면 그것은 그 자신도 흐뭇해할 것 같기도 합니다. 자신의 “사도”됨을 과시하려 했으니 말입니다.

바울이 “인간적”이었다는 것은, 그를 악평하거나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고 기어코 대결했다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면 어떻게 저러면 어떠리”하는 초연한 태도는 그의 “인간됨”이 허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기를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왜 사도가 아니냐?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일부러 내려오셔서 나를 “사도”로 임명하셨는데 내가 다른 사도들보다 못할 게 무어냐? “사람에게서 온 것도 아니요 사람을 통해서 된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셔서 사도가 된 바울이다.…”(갈라디아 1:1)하고 자기를 자랑삼아 소개합니다.

이렇게 자랑하려면 자랑할 것도 많았던 것입니다.

그는 “선민”의 후예로서 베냐민 지파 소속이라는 족보 자랑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회적 국제적 특권의 소유자기도 했습니다.

그는 율법학의 최고권위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율법학의 최고수준에 도달한 유대교 학자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어, 희랍어에 능통한 어학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 문화 속에서 자라난 그리스적 유대교의 전문지식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은 전통주의적 유대교를 전승한 분이라 하더라도 헬라 문명에 대한 지식도 갖추었을 것이고, 그 문명에 대한 비판력도 날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헬라문명권 안에서도 지성인이었다 하겠습니다.

그를 재판하던 로마 재판관 베스도가 그의 그리스도 변증 진술을 듣고서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신비경험에 있어서도 어느 누구만 못한 데가 없었습니다. 삼층천에 올라가 낙원에서 천사의 말을 들었노라 했습니다. 그때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노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자랑을 분토같이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만을 자랑하노라 합니다.

그러면 이런 각도에서 본 바울의 그리스도 자랑이란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성경본문에 의하면 -

[1] 솔직한 양심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자기의 자랑이라 했습니다.

모든 강단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고장입니다. 그러나 “솔직한 양심”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닐 경우도 많습니다. 직업적으로, 자기선전용으로, 교회확장술로 그리스도 증언을 수단화하는 일이 많습니다.

[2] 그리스도의 깊은 진리를 날마다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 모두의 자랑이라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그리스도 지식이 날마다 새로워 그 영의 생명이 성장하고 그것이 우리의 품격이 되고 우리의 생활이 되어 “종말의 날”까지 끊임없이 자라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자라려면 봄의 바람, 여름의 벌레, 가을의 비, 겨울의 눈보라 등등 괴롬을 겪어야 합니다. 그것이 “수난의 자랑”이겠습니다.

자라도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지엽이 무성하기만 하고 열매는 안달린 무화과나무는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쓸데없이 땅만 차지한다고 농부는 찍어버리려 합니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자랑은 지엽이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았습니다. 단기간에 교회수, 교인 수가 놀랍게 늘었습니다. 그러니 그만큼 열매도 풍요해야 진짜 자랑이 되겠습니다. 그리스도가 큰 기대를 갖고 찾아옵니다. 그때 그에게 드릴 열매가 없다면 그는 저주하고 떠날 것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열매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갈라디아 5:22 이하에 “사랑, 기쁨, 평화, 관용, 자애, 선의, 충실, 유화, 자제” 등등의 윤리적 과실을 열거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매는 없고, 탐욕, 권력룍, 시기와 질투, 적개심, 분쟁, 분열, 분파, 안일 등등의 악충이 번성한다면 역사의 주인이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그걸 가만두실 것인지 자신이 안납니다. 우리 자랑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신앙과 생활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 성직자와 교인의 약점은 진리탐구의 의욕이 약한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날마다 깊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이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공부하는 교직자와 교사와 교인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새롭게 깊어질수록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 자신을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체시고 천지창조의 동역자시며 하느님 영광의 광채시고 하느님과(빌 2:6) 동등되시는 위치에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빌 2:6).

그런 고귀하신 분이 우리 죄인들을 속량하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으니 우리가 그를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예법이고 동시에 우리의 최대의 자랑이란 말이겠습니다.

[3]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중에서도 특히 그의 “십자가”를 자랑하라 하셨습니다.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갈라디아 6:14)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율법학자로서의 교만, 스테반 살해 책임자로서의 “죄인의 괴수”, 다메섹 크리스찬 학살사명을 받고, 출전장군인양 의기를 돋우면서 행군하던 “그리스도의 대적” - 이런 자기를 그리스도는 한 마디 나무람 없이 친히 나타나, 불러, 영원한 생명의 계열에 동참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해주신 그 은혜를 생각할 때 그는 언제나 황송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서 내가 산다”, “내게는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다”하고 증언합니다. 그러니 그의 자랑은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일 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그가 저지른 모든 죄와 그 자신의 특별한 하느님 반역죄, 성령모독죄 등등을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대속하시고 자기를 “의인”으로 불러, “제자직”, “사도직”까지 주셨다는 데서 풀이한 “자랑”인가 합니다.

바울은 천막 만드는 숙련공으로, 간데마다 노동하며 자급 전도자소 시종했습니다. 구제비와 여비의 일부는 바울이 세운 교회에서 담당하는 일이 있었으나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교우들에게 폐 끼치는 일을 피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자랑합니다. “내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랑만은 헛되게 하지 않겠다”고 흥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 앞에서 설교하는 나 자신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1] “인간”된 것을 자랑합니다.

“하느님 형상”으로 지어진,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동작업으로 창조된, “인간”의 후예라는 것을 자랑합니다.

억천만년 과거를 이 “몸”의 심연 속에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진화의 계열에서 탈출하여 “영”의 계열에 들어간 존재자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이 자랑은 아무도 뺏아갈 수 없습니다.

정치권력자도, 경제계의 천만장자도 뺏을 수 없는 자랑입니다. 나는 짐승이냐 벌레나 기계가 재산같이 다룰 수 없는 “하느님 형상”인 나입니다.

[2] 바울은 자기 족보를 자랑삼아 말했습니다만, 내게도 “족보”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자랑스러운 족보일지는 의문입니다. 자랑스럽다 셈치더라도 그걸 자랑하기에는 시대가 너무 민족적이고 대중적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국민족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합니다. 세속적으로는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다 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종교적으로는 어느 동양민족보다도 감수성이 풍부합니다.

특히 기독교에 있어서 십자가를 몸에 지고, 수난을 영광으로 여기며, 고문에 태연하고, 감방에서 노래하고, 독방수인으로 시를 읊으며, 사형선고에 “영광입니다” 할 수 있는, 우리 수난민족의 일원임을 자랑합니다.

[3] 바울은 자기가 유대교 율법학자인 것을 자랑삼아 내세웠습니다. “네가 율법학자냐? 나도 그렇다. 나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다!” 하고 항변했습니다.

나도 생판무식쟁이는 아닙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아는 체 해 봅니다. 유교의 줄거리도 대강은 안다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측광”(Side Light)으로 유교를 보면 그 정체가 더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후일담이고 전부터 기독교가 우리 가정 종교였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가정종교라면 “유교”였을 것입니다. 내 나이 18세 때, 나는 함경북도 북도 끝 “웅기”라는, 한 스산한 어항에 자리잡은, 작은 금융기관에 “서기”로, 취직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비전”을 보았습니다. 내 키보다 헐씬 높은 백옥비석이 하나 작은 배에 담겨 내게 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비석은 매끈하게 다듬어졌습니다만, 글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공자님께 드릴 기념비다. 네가 글을 지어 비면에 아로 새겨 완성할…”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깨어났습니다. “별난 꿈도 있다” 하면서도 그대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잊히지 않는 꿈”의 하나였습니다. 그때 나는 기독교에 대하여 아는 바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이름만 싫어했었습니다.

이것은 한토막 “삽화”로 적는 것 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빛 속에서 자기를 보았고 그 빛의 너무나 높은 광도 때문에 자기 눈이 멀었노라 했습니다. 그의 많은 지식의 눈이 그리스도 지식 앞에서 “맹점”만 드러났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웅기 생활 중에 거미줄만큼한 지식의 실마릴망정 그리스도와 공자와의 사이에 걸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4]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자임을 자랑합니다. 일부러 자랑한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어떤 경우에 그것을 자기 보호의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소 시에서 전도할 때, 어떤 점쟁이 여인을 성하게 해준 것 때문에 그 점쟁이 여인의 “복채”를 중간착취하던 물주가 지방장관에게 바울과 실라를 영업방해죄(?)로 고소하였습니다. 지방장관은 두 사람을 피투성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감옥에 가뒀습니다. 감옥에서도 제일 구석진, 통속 같은 골방에 가두고 쇠사슬로 손발을 묶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감옥 안에서 도리어 즐거웠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하며 기뻐했습니다. 갑자기 지진이 나며 감옥 터전이 마구 흔들리고 옥문이 부서지고 쇠사슬이 동강동강 잘라져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도망하려며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간수장은 “국사범” 즉 로마제국의 국가반역자일지 모르는 중죄인을 놓쳤다는 책임상 사잘하려고 칼을 뺐습니다. 바울은 큰소리로 고함쳤습니다.

“우리 다 여기 있다. 자살하지 마라!”

간수장은 뛰어와서 바울과 실라 앞에 큰절하고 자기집에 음식차리고 상처를 소독하고 싸매드리고 “제발 평안히 가십시오” 하며 사과했습니다. “너희가 ‘로마시민’을 제 멋대로 잡아다가 제 멋대로 고문하고서 이제는 또 제 멋대로 석방하려느냐? 나는 로마시민의 자격으로 너희 지방장관을 걸어 카이사에게 직접 고소하겠다”, “그래서 로마법에 의한 정식재판에서 내 승부를 판가름하련다!”하고 대들었습니다. 그들은 깜짝놀랐습니다. 바울은 한 타협안을 냈습니다. “지방장관들이 직접 내게 와서 사과해라!” 그래서 장관들이 바울 앞에 와서 사과하고, 떠나기를 간청했습니다. 바울은 선교의 길을 다시 걸었습니다. 로마시민권도, 이런 경우에는 그의 자랑 구실을 톡톡히 한 셈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시민입니다만, 캐나다 시민권도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그밖에 여러 자유진영 나라들 여행에 아무 지장도 없습니다. 일본여행에서도 공항에서 영어로 지껄이고 캐나다 여행권을 내보이면 무사통과입니다. 일본말로 문답하면 “조센징”이라고 당장에 반말이 뇌까려집니다. 나는 일본인의 경망한 태도에 치욕을 느낍니다만, 캐나다 시민된 것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 증인으로서의 무기가 된다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의 자랑은 ① 예수가 그리스도 즉 약속의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었고, ②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와 사망을 자신이 속량하는 속죄제를 “몸”으로 번제단에 드렸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③ 하느님이 그 속죄사랑을 옳게 여기셔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하느님 우편에 앉아, 하느님 나라 정치를 담당케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구원의 경륜을 가능케 한 원동력, 그 “핵”은 “십자가”의 속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그가 십자가를 기피했었다면, 그리스도도 없고 인간구원도 없고, 종말의 우주적 구원도 없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 바울이나 여러분 신도들이나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자!” 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세로 내리꽂힌 하느님의 사랑과 가로 뻗은 인간과 인간과의 사랑이 그 심장부에서 교차된 형틀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교차점에 자기 몸을 못박았습니다. 하느님의 속량사랑과 인간끼리의 화해사랑이, 중심부의 그리스도 심장, 그 창에 찔려 터져 흐른 피의 생명으로서의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것입니다. “수직”과 “평면”이 함께 “사랑”의 샘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신에의 감화 안에서 인간에의 사회를 이룩한다면 거기서, 세속사가 구원사로 변질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과 화목하고 인간끼리 화목하면 세계평화도 “유토피아”에서 현실에로 변질할 것입니다. 언제 이런 종말의 완성이 올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만, 이 거대한 경륜이 진행중인 것은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는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반도는 지금 비찬한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가장 “소망”적입니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양심적인 기독자가 있어, 하느님의 의로운 사랑을 “수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여 행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십자가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영광의 광채”라 하겠습니다. 그들의 자랑은 십자가요, 우리 역사는 십자가를 통하여 창조되는 행진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씸벌”로 된 “거룩”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믿는 개인을 천당에 들여놓는 Ticket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메어야 할, 그리스도의 “제자직”입니다. 기독자의 생활 “원형”입니다. 우리가 자랑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자랑은 십자가요, 우리의 자랑도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가장 높은 축복입니다.

그것은 노자의 말대로 한다면 “손해보는” 생활입니다. “損之又損” - 손해보고 또 손해보고 하여 더 손해볼 건더구니가 없게 된 때 즉 “無”(무)가 된 때에 하늘의 길이 “유” 즉 “있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내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마감 절규는 그가 하느님에게까지 버림받아 아주 “없음”이 된 때의 심경이었습니다. 그것은 “죄인”으로서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하느님의 “아멘”이 선포됩니다. “내가 너의 속죄 제물을 옳게 여긴다. 네게서 만민의 죄가 청산됐다.” 그 하느님의 “아멘”이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영원한 생명의 “구세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하느님의 실권을 대행하십니다. 하느님 우편에 계십니다. 동시에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우리 옆에 계셔서 우리의 진실한 위로자, 상담자, 구원자로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곤고를 나눕니다. 우리가 감옥에 들어간 때 그도 우리와 함께 감옥에 계십니다.

우리가 법관 앞에 설 때 그는 성령으로 우리의 할 말을 말하게 합니다.

진실로 그는 우리의 자랑,

여러분의 자랑,

그리고 전인류의 자랑입니다.

1980년 4월
재일본한인 동경교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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