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4일 금요일

[범용기 제6권] (1635) 감사ㆍ개인ㆍ역사

[범용기 제6권] (1635) 감사ㆍ개인ㆍ역사
[데살로니가전서 5:12-22]

이번에 취임한 지 34일만에 갑자기 세상 떠난 바울 존 1세 법왕은 이태리 북쪽 산악지대에서 가난한 산촌민을 상대로 목회하던 목자였다고 합니다. 그의 목회 방법의 하나가 부지런히 편지쓰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토론토 스타아”지에도 자세하게 소개됐습니다만, 그의 말대로 한다면 “내가 별 사람에게 다 편지하면서 예수님에게는 편지한 일이 없으니 그게 말이 되느냐?”하여 예수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무척 길게 썼다고 합니다.

그걸 읽어보면 예수님도 굉장히 즐거워할 것 같은 진정한 신뢰와 사랑이 넘치는, 소박하면서도 감격스러운 문학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Thank you!”, “Thank you very much”하는 말을 수 없이 씁니다만, 진정으로 “하나님”께 “Thank you”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식사시간에 거의 형식적으로 하는 정도일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정 우리의 심정을 속에서부터 쏟아가며 하느님께 감사해 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일년에 한번씩 교회 행사로서의 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① 우리가 개인으로서의 인격생활에서 본다면 형식만이 아닌, 진정한 감사는 여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심한 사람”, 마음 속이 자기 걱정으로 꽉차 있는 인간은 자기를 지켜, 남이 자기 권내에 얼씬도 못하게 하려니까 언제나 긴장해서 자기보호 기능으로 팽팽해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감사”의 여유가 없게 됩니다. 그 대신에 불안과 불신과 경계와 정보사찰 행위가 늘어갈 것입니다. 독재자가 정보국가를 만드는 것은 그런 심경에서 발생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② 둘째로 – 감사는 성숙한 인간이라야 가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성숙한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 책임질 줄 압니다. 자기 일은 자기가 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소용되는 것을 자기가 다해 낼 수는 없습니다. 서로 협동하고 교류하는 사회생활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성숙한 인간은, 내가 미처 못한 내 할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해주고 맞들ㄹ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척 고마워합니다. 그러므로 문화와 교양이 높은 인간일수록 “감사한다”는 말이 더 많이 쓰여집니다.

③ 감사는 너그러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욕구불만과 복수심과 질투와 증오로 가득찬 마음의 좁디 좁은 방에는 감사할 공간이 없습니다. 그 마음 속에 “원수”라도 안심하고 앉아 있을 공간이 미리부터 마련돼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마음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④ 감사하는 심정의 극치는 하느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고 나를 알아 주신다는 경험에서 그 극치에 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5-27에 예수께서 자기의 심정을 솔직하게 표시한 아주 감격적인 고백이 쓰여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재자이신 아버지, 이 모든 것을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이 같은 자에게는 나타내 보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아버지를 계시하여 주시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아버지”가 자기를 알아주시는 데 감격하고 감사하는 기초 위에서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하는 여유 있고 활짝 트인 마음자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나된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하느님 아들을 무시하고 그 신도를 살해하던 자기를 불러 만방의 “사도”로 임명하신 영광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그가 느낀 “오직 은혜”(Sola Gratia)는 우리로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이 아니라도 우리 모두가 거룩하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두려움 없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믿음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소위 Open mind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것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더 요구하지 않습니다. 열기만 하면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서 새로운 창조작업을 시작하십니다. 새 인간으로 변화되면 그만큼 그 인간의 감사는 새롭게 샘솟습니다.

그런데 역대의 우리 신자들, 교회인들은 그 마음의 그리스도와 인간을 향하여 열린다는 것보다도 도리어 닫히는 경향을 택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① 세상은 불결하다는 것 때문에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② 자기의 신앙고백이 다른 교파 기독자들보다 다르다는 것 때문에 신자끼리서의 친교의 문을 닫습니다. ③ 나라가 다르면 성도의 교제도 닫습니다. 특히 전쟁 중에 서로 총부리를 겨눕니다. ④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은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교회도 서로 문을 닫고 노려만 봅니다. 자기 나라 안에서도 서로 열어 놓고 사는 것보다 더 굳게 닫고 사는 것이 “안보”가 된다고 담을 둘러쌉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듯이 바깥은 둘러막는 데 열중합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2代만에 망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감사보다도 원망으로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담장을 둘러막고 그 위에 철조망까지 친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보다도 담장에 쓰는 돈으로 집 자체를 견고하게 짓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집을 든든히 짓는 것보다 일반 인심이 이웃을 향하여 열리고 개방과 친교와 사랑으로 한몸되는 것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이 운동이 사회구조와 그 운영에까지 발전되게 하려는 것이 교회의 사회화 운동인 것입니다.

[2] 1945년 8.15해방 때 우리가 얼마나 즐거웠고 얼마나 감사했던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 개인보다도 내 나라와 민족과 역사에 자유와 해방이 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감사절과 역사의 관계됨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감사절은 종교적 명절의 하나입니다만, 각 나라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축제일이기 때문에 제각기 그 지키는 날짜가 다르고 그 날짜 제정도 나라마다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8월 1일, 독일복음교회에서는 9월 29일 성미가엘의 날을 감사절로 지킵니다. 미국에서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찾아 미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 1963년에 “폴리마우스”에서 황무지를 뒤집고 심은 곡식이 익었을 때 그 곡식가리 앞에서 하느님께 감사예배 드린 것으로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것이 국가적 행사로 지켜진 것은 1776년 와싱톤 대통령이 11월 26일 감사절로 책정한 때부터랍니다. 링컨 대통령은 1939년에 11월 제3목요일로 정했다고 합니다. 캐나다에서는 또 캐나다 역사에 따라서 10월 둘째 월요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미국에서 정한 날짜를 추종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 추수감사절은 농경시대의 축제일이었습니다. 새 곡식을 얻는 기쁨에서 하느님 또는 신령님 앞에 감사하고 농민끼리서는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남녀노소 모두 어울려 집단으로 줄다리기 상타기 등으로 즐기는 계절이었습니다.

거센 자연과 싸워서 생존했다는 기쁨, 생존하려면 우선 먹어야 하는데 이제 먹을 것이 준비됐다는 기쁨에서 감사한 것이었습니다.

하루를 굶어보면 “밥”이 얼마나 대견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民以食爲天)고 했습니다. “김지하”가 “밥이 하늘이다” 한 것은 이런 데서 나온 생각일 것입니다.

현대 산업사회 도시인으로 사는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넋두릴지 모릅니다.

제 손으로 농사를 짓지 않고서도 온갖 좋은 음식은 제일 먼저 골라 먹는 것이 농민 아닌 도시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원천은 역시 농사며 사회구성의 터전되는 밑바닥은 농민입니다. 캐나다나 미국에서는 농사도 기계화했고 농민도 도시인이 돼서 진짜 농경사회 기분이 희박해졌습니다만, 그래도 어딘가 여운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도시인이 농민을 “시골뜨기”라고 경멸하는 것은 제 낯에 침뱉기라 하겠습니다.

오히려 도시인일수록 농촌분위기에 친숙하고 농민과의 친교를 긴밀하게 하고 농민과 함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농민은 자연의 생명과 그 성장과정과 창조성능에 직접 또 간단 없이 동참하며 삽니다. 산과 언덕과 못과 시내와 물레방아와 새와 짐승과 어울려 친합니다. 그 삶이 율동적입니다. 그 반면에 도시인은 시간 노동의 노예로 자기일 아닌 직장에 매여 삽니다. 편리할지 모르겠지만 창조의 기쁨은 없습니다. 오래가는 동안에는 정신적 심리적으로 긴장, 초조, 불안, 탈선, 인간성 상실 등등의 말세적 현상에 말려듭니다. 더군다나 경제공황 때문에 실업이나 된다면 인간긍지까지 잃기 쉽습니다. 아주 굶지는 않아도 사는 모습이 구질구질합니다.

그러니까 도시인일수록 농사일과 농촌의 유장(悠長)하고 고요한 풍경, 그 농산물의 생명적 율동에 감격과 감사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추수감사절은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역사의 원초, 그 이전부터 지켜온 명절이랍니다. 그러므로 그 유래를 다른 나라 역사에서 빌어올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고구려의 “東盟”(동맹), 부여의 “迎鼓”(영고), 濊(예)의 舞天(무천), 三韓(삼한)의 蘇途祭(소도제), 고려의 八觀(팔관), 이 모두가 추수감사 제전이었답니다. (柳東植)

그 때에는 제천(祭天)과 군무(群舞)와 가요와 집단경기 등 다채로운 행사로 임금님까지 나오셔서 함께 즐겼다고 합니다. 불교의 관등(觀燈) 놀이도 겹쳤답니다.

이것은 추수의 기쁨과 아울러 다음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제전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이라기 보다도 집단적이고 국민적임과 동시에 종교적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기독교에서 습화(習化), 토착화하였더라면 기독교가 저절로 민중종교로 용납되었을지 모릅니다. 반죽속의 누룩이 되어 우리 역사에 어떤 변질을 빚어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지금쯤에는 추수감사절이 우리 역사에 생리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최근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것을 깊이 느끼고 기독교의 토착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한국 민속명절 중에서 제일 크고 보편적인 것은 설날과 추석날입니다. 추석날은 하늘이 푸르고, 달이 밝고 초가을 바람이 시원하고, 햇곡식이 여뭅니다. 올 벼가 익어 첫 햅쌀밥을 먹는 날입니다. 그래서 감사로 조상과 하늘에 제사지내는 날이기도 합니다.

“제사”는 원래 “추모”의 날임과 동시에 조상에게 즐거움을 여쭙는 날이랍니다. 그러기에 “실학파” 유교 분들 중에는 조상의 묘소 앞에서 북치고 노래하며 조상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제사”에 대신한 분들도 있었답니다.

한국 개신교에서도 추석날을 감사절로 제정했으면 얼마나 좋고 자연스러울까 하고 제언합니다. 한국 카톨릭 교회에서 벌써 추석날을 감사절로 지킨답니다. 그런데 신교에서는 아직도 미국 역사의 꼬리에 편승한다는 인상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랑일 수가 없겠습니다.

최근의 한국역사에 있어서 양력 8.15는 정치적, 민족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된 날이고 음력 8.15, 즉 추석날은 종교적으로 그 해방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날로 지키자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컨대 “감사”는 나 개인이나 내 가족에 대한 과거의 호의와 은총을 감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민족적 역사적으로 전 국가와 사회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감사하는 것이 더 성숙한 감사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의 감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과 봉사로, 상실된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해 주시고 우리에게 그 위대한 사업을 계승하게 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고 다짐하신 그 약속의 동참자가 된 영광된 소명을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세상 나라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나라로 되게 한다는 역사 자체의 천국화 운동에 우리를 불러 써 주시는 특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인간과 자연과 전우주가 통틀어 사랑의 공동체로, 영광 속에서 메시야 찬가를 부르는 미래의 전적 구원에 대한 감사 – 이런 거대한 감사와 찬송이 우리의 감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의 조건과 범위가 넓고 크고 높기 때문에 당장 눈 앞에 정황 만이 아닌 종말학적인 미래와 전세계, 전우주를 그 감사의 범위 속에 포괄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한 바울의 말은 그런 마음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헨델의 메시아 찬가가 전우주에 울려퍼질 때 우리의 감사는 영원한 보좌 앞에 영원한 향연으로 그윽할 것입니다.

1978년 10월 8일 토론토 한인연합교회
감사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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