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1일 화요일

[범용기 제6권] (1633) 목회자의 이미지

[범용기 제6권] (1633) 목회자의 이미지시편 23편
[요한 21:15-17, 히브리 1:1-3]

구약에서의 “하느님 상”(像)은 주로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 하는 첫 성경말씀이 서론이고 결론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관계를 초월한 절대자임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은 누가 지었느냐?” 하고 스스로 영리한 체 하는 사람들도 종종 봅니다. 그러나 누가 지어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벌써 하느님이 아니게 됩니다. 그건 말 자체 안에 Subject와 Object가 가설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입니다. 하느님은 “절대주격”입니다. “客格”(객격)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도 Subject입니다만 그건 상대적인 주격입니다. 나와 타인, 나와 자연, 나와 하느님 등등의 표현이 “인식”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각기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다른 이름들과 구별하기 위해 있는 것이어서 상대적입니다.

모세가 하느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그는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나다” 영어로 “I am that I am”이다 하고 대답했답니다. 히브리어로는 “하야아”라는 “to be” 동사에서 유래한 것인데 사실은 제1인칭이 아니고 제3인칭이어서 “Who Causes to be” 랍니다. “되어가는 하느님”이랄까, 되어가게 하는 하느님이랄까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 번역에서는 처음에 “여호와”로 다음에는 “야웨”로, 최근의 공동번역에서는 “야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것은 학자들께 맡기기로 하겠습니다. 그보다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내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라고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하늘 위에 초월해 계신 영원불변한 “존재”라는 것 보다도 역사에 나타난 역사 안에서 일하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이란 뜻입니다(출 3:15, 16 참조).

역사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인간들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호칭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친히 몸으로 나타나 말씀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어떤 “인간”을 통하여 그때그때의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단편적인 계시를 하신 것이랍니다. 그러다가 마감 날에는 자기 아들을 보내어 Overall한 계시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옛날에는 우리 조상들에게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에 걸쳐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드님을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상속자로 정하셨으며 그를 통하여 모든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의 본체의 완전한 표현이시며 그의 권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또한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분의 오른 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는 천사들 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이름을 물려 받으셨습니다. 그는 그만큼 천사들 보다 훌륭한 분이십니다.” (히 1:1-4)

위에 인용한 히브리서 기자는 사도 바울에 비하면 뭔가 그 표현이 장황하고 산만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직접적인 신앙 “고백” 보다도 “변증”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바울이 썼다면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들 메시야로서 ‘아버지’의 완전 계시자임과 동시에 그 완성자이십니다”로 끝냈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들로서 하느님 나라를 땅 위에 세우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 건설의 전선기지(基地)로서 후일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나라는 죄와 사망에서 인간으로 구원하는 복음의 전파에서 시작됩니다. 그 소식이 “복음”입니다.

교회는 이 “복음”, 즉 기쁜 소식의 전령자임과 동시에 그 작전 본영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이 거대한 범 우주적 건국운동이 순조로웠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으로 본다면 “구원사”(史)는 “구세주”를 맞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까지에 예언은 끝났습니다. 요한은 예수를 “구세주”로 만인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백성 가운데 오셨지만 그의 백성이 그를 몰라보고 그를 배척하고 불신하고 마감에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를 다시 살리셔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이상 왕국의 이상적 왕”인 “메시야”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시편 제2편에 말씀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를 믿고, 예배하고, 그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의 삶을 우리 삶 속에 “일체화”하여 그의 부활에 동참하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그의 증인으로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활동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관”입니다.

그리스도의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1) “그리스도 상”을 똑바로 보여줘야 합니다. 예수가 수난을 각오하고 최후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실 무렵에 몇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제자 빌립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를 보고저 하노라”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신의 아들 “예수”란 분을 유대인들이 몰라보고 천대하고 죽이려 한다니 어디 우리가 그를 우리 나라에 모셔다가 ‘신의 아들’로 숭배하고 기껏 대접해 드리자“ 하는 심산에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대답했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지금 교회시대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교회당 안에 모시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보려거든 교회에 나오십시오….”

세속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교회당에 가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혹시 교회당에 가도 예수가 잘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진짜 꾸밈새 없는 예수를 우리 세속에 오시게 해 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보고저 하노라” 합니다.

교회가 예수를 세속사회에 모셔간다면 후일에는 세속인이 예수를 모시고 교회에 올 것입니다. 어떤 새 형태의 교회를 창조하기도 할 것입니다. 기성 교회만이 교회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기성 교회가 교회가 아니란 말이 아닙니다.

목사는 그런 의미에서 세속인, 특히 불우한 소수인들의 고난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동시에 풍요한 유산층에도, 자족하는 중산층에도 들어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여줘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첫째가는 사명입니다.

(2) 교회는 역사 안에 있는 일종의 구조체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육법전서”로 다스려지는 구조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영적인 기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됐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났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역사 없이 예수를 ‘주’로 믿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내 속에서 나를 하느님 형상대로 다시 창조하십니다. 그러나 새로 탄생한 나는 영적, 도덕적으로 갓난 애기와 같습니다. 어머니나 누구가 먹여주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주고 병나면 치료해주고 보살피고 그 성장에 따라 교육하고 상담하고 해 줘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 작업입니다. 칼빈은 교회의 성질에 대하여, “신자가 모여서 교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어머니 품에서 신자가 나서 자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근본 임무는 목회인 것이며, 그 임무의 주도자 또는 전업적 전문가가 “목사”인 것입니다.

(3) 교회가 이렇게 중요한 기관입니다만, 목사가 자기 교회 안에 농성하여 자기 교인만을 염두에 두고 “큰 교회” 만들기만 힘쓴다면 그것은 이른바 “교회주의”여서 결국에는 “교회”가 기업체처럼 되고 “교회 이기주의”가 되고 맙니다. 그런 교회는 사랑을 나누지도 못하고 세상의 고난에 동참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예수 믿으라 외쳐도 세상이 우습게 여깁니다. “또 설교냐?” 하고 야유합니다.

교회의 목회자는 넓은 Vision을 봐야 합니다. 목사는 교회인임과 동시에 세계인입니다. 세계가 한 “교구”입니다.

목사는 선교자입니다. 목사는 세계선교의 책임을 집니다. “맡은 내 교회를 잘하면 그게 세계선교의 한 몫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냐?”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세계선교사란 말과 세계전체를 교회 안에 불러 들인다는 것과 뜻이 다릅니다. 그런데 대개는 후자를 택합니다. 그래서 “부흥회”를 자주 합니다. 그건 죽어가는 사람에게 캠풀주사 놓는 격이어서 항구적이기 보다 응급술입니다.

생명의 성장은 더디나 건실합니다. 풀이나 나무는 안에서부터 자라서 밖으로 커지는 것이기 때문에 급속한 성장은 허약점을 내포합니다. 단단하지 못하단 말입니다. 과대한 의욕은 과대한 시행착오를 일으키는 것이 상례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집권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히틀러의 경우에서도 그렇고 일본 군벌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론적으로 : 목사는 “목양자” - 영어로 Pastor라고 부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하고 예수 자신이 자기를 규정한 일도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도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이름했습니다. (시편 23편)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마감 부탁도 그러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내 양을 먹여라.”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겹잡아 반복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성격에 다소 허약점이 있는 것을 예수께서 아시기 때문에 그가 고난 당할 때에 이 말씀을 기억하고 다시 용기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요한복음 기자는 말했습니다. “양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어쨌든, 교회에서의 목사는 이스라엘에서의 “목양자”와 같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떼를 먹이는 것이 본직임과 동시에, 잃어진 한 마리 양을 찾아 험산준령을 밤새워 헤매는 것도 목자의 고귀한 직책입니다.

지금의 “상실된 인간”을 되찾으려는 인권운동, 인간존엄사상 고취, 피압박 인간집단을 위한 인간 해방운동 등등은 그대로 목자의 임무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 당연성에서 출발한 것이어서 딴 얘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위엣 내용을 정리한다면 ① 목사는 그리스도를 세속인에게 보여주는 선교, ② 구조적인 교회에서의 인간성 보육사업, ③ 세계 선교적인 개방된 정열과 “악령의 Demonic Power”에 대한 항거와 증언, ④ 상실된 인간군상을 향한 인간회복운동 등등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목사”인 한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책임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도우심도 “작은 일도 큰 일 같이, 큰 일도 작은 일 같이” 신중하고 담대하게 맡겨진 목사의 사명을 다하여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착하고 성실한 청지기로 하늘의 상 주심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1977년 10월
김익선 목사 토론토 연합교회 취임식 설교

댓글 1개:

  1. '목회자'의 이미지라고 하지만, 오늘날 교회가 어떠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종교개혁 이후에 '만인 사제직'이 줄기차게 거론되었지만... 가톨릭의 교황처럼 개신교회(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나름 최선을 다한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그가 이끄는 양떼들은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를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투철할 때... 대형교회의 세습이나 각종 비리들은 근절될 수 있을 것이다. 가끔은 그런 세습이나 비리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이 목회했던 것을 자신있게 보고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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