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8일 목요일

[범용기 제6권] (1616)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

[범용기 제6권] (1616)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1-9)

인간이 장성하여 자기를 발견하고 하느님과 절연했을 때 하느님이 찾아와서 처음으로 물은 말씀입니다.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말 성경에는 “하느님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로 번역돼 있습니다.

“아담”이란 낱말을 첫 사람의 이름, 즉 고유명사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원문대로 본다면 보통명사인 “인간” - “사람”이란 뜻입니다.

히브리 말에서 “인간”을 “아담”이라 하고 흙을 “아다마아”라고 합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 해서 인간이란 말과 흙이란 말을 동일어로 표현했습니다. “아다마아”는 “아담”의 여성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있는 “아담”, 즉 인간이란 말에는 정관사 “하아”까지 붙어 있습니다.

영어로 말한다면 “The man”입니다. 고유명사에는 정관사가 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고유명사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지금의 우리까지 포함한 “인간”과 하느님 관계를 이 설화에서 발견한다는 말입니다.

에밀 부르너의 말을 빌린다면

“Every man his own Adam”인 것입니다.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인간이 하느님 관계에서 단절된 때,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느님을 이반하고 자신을 신화(神化)했을 때, 그 인간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으며 그 위치, 품위는 어디에 낙착됐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 인간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국에서 모든 “매스콤”을 총동원하여 선전하는 말은 “인간이 배불리 먹고 편하게 살면 그만이다. 그것이 잘 사는 것이고 그것 자체가 ‘복지’다”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빈곤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탈출해서는 어디로 가느냐? “So What?”의 다음 단계는 생각할 여유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태도란 말입니다. 더군다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저 하늘에 있다는 하느님 관계는 쓸데 없는 ‘귀신단지’다, 하고 반발합니다. 그래도 온건하다는 부류의 사람들은 “글세, 그건 그때 가 보지요”합니다. “Once at a time”쪼라 하겠습니다. 돈이 하느님 노릇하는 데 또 무슨 군더더기 “하느님”이냐 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 진영이나 자본주의 진영이나 꼭 같은 “물건”(Things)이 있고 하느님은 없습니다. 유물주의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은 어디 있습니까?

1930년대 이후에 인간은 두 진영으로 갈라섰습니다. 하나는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그물에 걸렸고 또 한편은 탐욕적 자본주의 즉 “마몬숭배”라는 큰 그물에 걸렸습니다.

전인류는 이 두 큰 그물 중의 어느 하나에 걸려서 그 그물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갑니다. 그 그물들이 하도 넓기 때문에 그 그물에 싸여 가면서도 상당한 자유를 느끼며 삽니다. 그러나 결국 그 그물은 점점 좁혀지기 마련입니다. 좁혀질수록 거기 걸린 인간들은 위기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 돌파구를 찾습니다. 그러나 다급하게 된 때는 벌써 너무 늦은 때임을 탄식하게 됩니다.

역사 안에서의 종말 심판이란 운명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은 “갱신”을 동반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인간상태는 개인보다는 사회에 그 중심이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민주 역사가 오랜 나라들은 빠른 ‘템포’로 민주체제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만, 민주주의에 익숙치 못한 나라들은 어물어물 하는 동안에 자유민주 아닌, 옛버릇이 반동을 일으켜 ‘쿠데타’가 ‘항다반’이 되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말만 많고 거추장스러워서 뛰는 발에 걸린다. 잽싸게 뛰어도 소위 선진국을 쫓아 가려면 앞길이 아득한데 어느 해가에 그러고 있겠느냐? 합니다.

“속히 해치우자!” 합니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독재체제로 급속하게 굴러갔습니다. 의회적 독재든지, 군사 독재든지, 공산 독재든지 간에 독재는 대략 비슷한 방식에 따라 인류를 그 그물 속에 몽땅 후려 갑니다. 독재의 구실은 대체로 속히 잘 살게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자유보다도 독재가 효과적이라는 그것입니다.

옛날 중국의 하(夏) 왕조를 망해 먹은 폭군으로 걸(桀)이라는 ‘영웅’이 있었답니다. 그는 사냥을 좋아하여 큰 그물을 둘러 치고서 축수하는 글을 써 붙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놈, 땅에서 올라오는 놈, 동서남북 사방에서 오는 놈, 모두모두 내 그물에 걸려라.” (從天隆, 從地出, 從四方來者, 皆罹於吾網)

그 때 어진 사람으로서 후에 “걸”을 정복하고 “은”나라라는 새 왕조를 세운 “성탕”(成湯)이란 사람이 이 축문을 보고 “일은 다 됐구나!” 하고 탄식했답니다. 그리고 “걸”의 축문 대신에 자기가 쓴 딴 축문을 거기에 붙였습니다.

“왼편으로 가려거든 가고, 오른편으로 가려거든 가거라. 그러나 내 이 명령을 짐짓 범하는 자 내 그물에 들어와라.” (欲左左 欲右右 不用命者 人吾絳)

이것은 국민에게 최대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포고입니다. 그러나 횡포한 불법자는 제거한다는 정책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라 “걸”을 없애고 그(成湯)을 옹립하여 “천자”로 삼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이 모두 내 그물에 걸리라 하는 것은 독재자, 전체주의자의 생리요 정책입니다.

소련의 스탈린은 전세계를 붉은 단색으로 칠하려 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전세계 인류를 독일민족의 “밥”이 되게 하려고 타민족 섬멸 정책을 강행했습니다. 일본의 군벌은 아세아 전체를 일본화한다고 미쳐 돌아갔습니다.

지금도 이 버릇은 더욱 광범위하게 퍼져가고 있습니다. 후진국들에서는 급속하고 효과적인 산업화란 요청 때문에 독재가 인기를 모읍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을 듣습니다.

인간은 각자의 사상적, 도덕적인 긍지와 양심의 준엄한 명령을 말살 또는 유폐시키고 경제적 소득과 육체적 향락만을 보유하게 됩니다.

정신적 자유는 감옥안 좁은 공간을 회전합니다.

집권자가 하라는 대로 따라가면 배 부르고 살찔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니게 됩니다. 개인자유도 인격 긍지도 잃어버린 “인간”은 “인간가축”일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엄한 인간으로서는 이런 조건에 오래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독재정권 아래에서의 인간은 기계의 부분품이거나, 살찌면 도살장에 갈 가축이거나, 위기에서 위기에로 숨어 다니는 도망자거나,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불구자거나, 육중한 마차를 끌고 허덕이는 천리마거나, 남의 눈치만 보며 안으로 삐뚤어진 눌려 자란 고아거나, 어쩌다 출세라도 하며는 배에 바람이 차서 공중에 떠도는 “허풍선”이거나 하여, 하느님으로부터 타고난 각자의 천품대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유롭고 다채로운 문화의 발전과 창조에 절름발이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비인간화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성에 부조리를 가져옵니다. 개인과 사회와의 긴장관계가 “예각화” 함에 따라 개인 이익과 사회 정의가 서로 충돌합니다. 그 평면적인 상극관계를 파열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돈귀신 “마몬”이나 싸움귀신 “마아스”를 하느님 자리에 앉히고 집권자 자신이 그 대제사장이 됩니다. 기독교의 하느님은 너무 높고 거룩하다기에 아예 접근할 엄두도 안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대체로 무신론자가 됩니다.

이론적 무신론이나 실제적 무신론이나 간에 인간은 모두 하느님 없이 삽니다. 그것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른이 됐기에 “신”을 필요로 할 만큼 유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를 “극소화”하여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서 하느님만 쳐다보는 것도 마찬가지 “비인간”이겠습니다만, 전자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제일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했는데, 현대인은 사랑할 하느님을 잃었습니다. 잃지 않았다 해도 사랑할 생각은 없습니다. “절연” 상태에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 인간이 가장 죄송하게 느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믿음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겠느냐?”

세기말에 예수가 다시 오시는 때의 인간조건을 예수는 탄식 삼아 예언합니다.

“말세에 내가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

현대인 사회는 “믿음 없는 세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메마른 사막에도 가담가담 “오아시스”는 있는 법입니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찾아오는 하느님 사랑의 표정입니다.

어쨌든, 대다수의 현대인은 믿음이 없습니다.

하느님 믿음 말입니다.

하느님은 절대주격(Subject)이기 때문에 믿음과 사랑 없이는 인지될 수 없습니다. 믿음 없는 현대인에게 하느님이 인지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절연된 상태에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사막의 Oasis를 세상의 교회라고 합시다. 그런데 그 “오아시스”마저 말라 버리거나 독초와 독충으로 오염되거나 한다면 인류는 삭막한 사막의 기갈에 허덕이다가 사멸할 것입니다. 극도의 인간상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먼저 하느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오는 것 같이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메시지 전달이 선교며 “돌아오라”는 메시지가 복음입니다.

산업화 사회에서는 인간이 자기 사상이나 인격이나 두뇌나 기술이나 몸이나 간에 모두를 경매장에 진열해 놓고 낙찰을 기다리는 비참한 상품이 되었습니다. 특히 실업자 군상을 보시면 그런 생각이 날 것입니다. 나는 1932년 미국에서 경제공황을 겪은 사람입니다. 헛소리가 아닙니다.

전에 아프리카 사람들은 억지로 끌려와서 노예 시장에 팔렸었지만, 지금의 인간은 자원하여 그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서운 악령의 시대라 하겠습니다.

인간이 만일 하느님을 정점으로 하고 개인으로나 사회로나 그이와의 정상관계를 회복한다면 그 때의 인간 상황과 위치는 어떠할 것입니까?

그는 그 자신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성령의 증언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존엄이 자기에게 생명적으로 접목돼 있음을 체험할 것입니다.

예수는 하느님과 일체의식에서 살고 죽고 다시 산 참 인간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하고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러니만큼 오늘에도 그는 하느님과 동등하게 존중받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땅에 건설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막 걸설돼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장 완전한 사회입니다. 그것을 인간이 땅에서 하느님과 협동하여 땅 위에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각 개인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존엄을 되찾고 사회가 하느님의 의와 사랑으로 일체가 된 나라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정점에 모시고 개인과 사회가 그 저변으로 된 삼각형적 생명관련에서만 실현 가능한 도안입니다.

묵시록 22장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였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그 어린양(그리스도)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는데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는 만국을 소생하게 하기 위하여 있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보좌에서 샘솟아 거리에 흘러들어 강으로 됐다는 것입니다. 거리는 세속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강 좌우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생명나무 숲으로 생산합니다.

그 인간들에게는 온갖 선한 열매가 맺습니다. “열매”는 그 인간의 품격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억억만 잎사귀는 만방을 소생시키는 “악”이 됩니다. 이것은 세계 보편문화의 재건을 의미합니다.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

“예,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비참하게 됐습니다. 이런대로 받아 주십시오.”

이 한 마디 응답에서 인간의 운명은 역전합니다. 하느님의 은혜의 질서 안에서 생명의 완성을 약속 받습니다.

이것은 현대인을 향한 복음입니다.

지식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믿는 사람에게는 인간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1973년 1월 14일
일본 동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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