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범용기 제6권] (1606) 한국의 민주운동

[범용기 제6권] (1606) 한국의 민주운동- 도미 후 와싱톤에서의 첫 보고 강연 -

정상적인 근대 한국의 전통은 자유민주 체제로 통일된 민주국가입니다. 38선의 남북 분단은 꿈에도 생각 못한 우리의 비극입니다.

지금 이북이 ‘공산독재’가 된 것도 원통한 일인데 ‘자유민주’로 출발한 남한마저 일인 독재로 전락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민족역사에의 역류입니다.

‘민주’란 것은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란 말인데 사실, 미 군정 시대에도 국민주권의 원칙 아래서 ‘제헌국회’가 있어 민주독립 국가로서의 준비를 해왔고, ‘국련’ 감시 하에 총선거에서 국민의 깨끗한 한표, 한표가 공명정대한 민주국가의 기반을 오염없이 구축한 것이었습니다.

국민에게, 주권을 행사할 민주역량이 없다는 말은 악질 정치인들이 조작한 악선전일 뿐입니다. 필자도 그때 부산에서 투표장에 나갔었습니다만, 바로 내 앞에 서있는 아주 초라하게 보이는 늙은 ‘할아버지’에게 내가 슬쩍 물어보았습니다. “노인장께서는 어느 분께 표를 던지시렵니까?” 그 노인은 정색하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비밀 투표인 줄 모르시오?”

나는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습니다만, 내 마음은 흐뭇했습니다.

국민은 현명했습니다. 다만 협잡 정치인들이 기만과 간계와 술책과 매수 등등으로 국민의 맑은 거울에 먹칠하는 것 뿐입니다. 국민이 현명하다면 그것까지도 못하게 해야 할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총칼 든 사람들에게 포위되면 아무리 현명한 국민이라도 ‘포로’가 되는 것이 전쟁풍경이 아닙니까? 미국같은 나라에서도 Watergate 사건이라는 부정선거 실태가 뒤늦게 드러나 체면유지에 조바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악질 정치인이 자유민주 한국을 ‘새치기’하려 한다 해도 결국에는 주권자에게 ‘토벌’되고 말 것입니다. 승패는 시기 문제일 뿐입니다.

지금 민주 한국은 군인에게 강점되고 국민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군인은 전쟁을 해야 신이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북의 남침이란 ‘가상적’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면서 전쟁 기분을 돋우고 있습니다.

국민을 가상 적으로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비상사태’를 선전하여 위기 의식을 조장해야 독재의 필요성이 산출되겠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본국 소식을 보고삼아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미 아시는 내용들일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본국에서 직접 당한 사람의 목격담이라는 데서 용납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금년 12월에, 한국은 비상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미국과 중공이 긴장 완화 상태에 들어가고 베트남에 파견됐던 미군이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조건 아래서 철수하게 됐다는 것 때문에, 무언가 다른 지역에서 강대국들의 불장난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려면 한국이 제일차 후보지가 될 것은 틀림없을 것이란 말이었습니다. 그럴듯한 얘기라고 국민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한국은 월남전쟁 때문에 9억 2600만 달러나 벌었다니까 월남 휴전은 한국경제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박’은 자신의 독재권 확립에 중심을 두고 그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일년 후인 1972년 11월 17일에 ‘박’은 갑자기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을 선언했습니다. ‘유신’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항간의 해설이 구구했습니다. 직접 일본의 명치 유신을 본뜬 것인지, 훨씬 더 원초적인 중국의 “周雖舊那文王維新” 즉 “주나라가 오랜 나라긴 하지만 문왕 때에 문물이 새로워졌다”는 옛 글에서 따온 것인지 출처가 분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전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국민은 왜 계엄령이냐 하고 대체로 납득 안가는 얼굴들이었습니다.

1972년 11월 21일에는 소위 ‘유신헌법’이란 것을 통과시켰습니다. 박정희 독재 체제를 ‘법’으로 합법화한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전주 남문교회 은명기 목사가 계엄령 아래에서의 국민투표란 있을 수 없다고 반대한 것 때문에 1972년 12월 13일 투표 전날 계엄령은 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해제 바로 전날밤에 정보부에서 예배당에 난입하여 기도회 집회중인 은명기 목사를 포고령 위반 혐의로 체포해 갔습니다.

1972년 12월 27일에 ‘박’ 씨는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거행했었습니다.

1973년 6월 29일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제일교회 박형규 목사와 그 밖에 14명이 구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석달 전 부활절 연합예배 때에 학생들이 민주부활의 ‘삐라’를 뿌렸다는 것 때문에 박 목사를 ‘정부전복’을 목적한 국가 반란죄로 몰아 체포한 것이었습니다.

박형규 목사는 한국교회의 중견 목사로서 부산 동아대학과 일본신학과 미국 유니온 신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목회하는 제일급 지성인이며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분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성질과 구조와 그 보편왕국적인 세계성을 알지 못하는 정보부원들은 “그까짓 목사 하나 쯤이야…!” 하고 마구 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 한달반쯤 되는 1973년 8월 8일에는 일본에 들린 김대중 씨를 역시 정보부에서 납치해 갔습니다. 박형규 목사는 으레 무죄로 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73년 9월 25일에 2년 징역, 3년 집행유예로 판결되었습니다. 후에 ‘보석’은 되었습니다만, 요새 또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973년 10월 2일에는 서울 문리대생 수백명이 정보부의 민간사찰 중지, 경제 대일예속 배격 등을 내걸고 ‘데모’를 시작하다가 현장에서 전부 검거되었습니다.

1973년 11월 5일에 사회 각계 인사를 망라한 15인의 연명으로 민주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장소를 얻을 수가 없어서 종로 YMCA 1층 ‘스낵빠’에 오전 11시에 모두 차 마시러 모여서 거기서 약 10분 동안에 다 해치웠습니다. 천관우 씨가 사회하고 내가 선언서를 낭독하고 함석헌선생이 취지연설을 하고 지학순 주교가 종교인 대표로 연설하고 만세 3창 그리고 헤어지는 순서였습니다. 장소를 빌려준 YMCA에서도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정보부 만능 하에 있었기에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찰 당국에서도 의외로 질린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10분 후인 만세3창 때에는 종로 경찰서 무장 기동대가 트럭 두 대를 끌고 YMCA에 달려와서 선언서를 압수하고 우리 모두를 연행했습니다. 경찰서에서 남산 정보부에까지 갔다가 그날밤 11시에 놓여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발화점이 되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1973년 11월 10일쯤부터는 한국신학대학생, 연세대생, 이화여대생 등을 위시하여 경향 각지 관, 공, 사립을 막론하고 두달 동안 거의 매일 학원 민주화와 일본 재침략 반대 등을 구호로 한 ‘데모’가 계속되었습니다. 현대적으로 무장한 데모 분쇄 특별 부대가 학교 문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거리에까지 나오지는 못했습니다만, 그 항거는 끈덕진 것이었습니다.

73년 11월 14일에 전주 은명기 목사가 다시 유죄로 판결되었기에 그가 속해있는 전북노회에서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끝까지 은명기 목사 편에서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을 다짐했습니다.

1973년 11월 17일 날짜로 N.Y.지구 한인유지 교직자 일동이 민주수호 성명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일본 교포들의 지지성명도 속속 알려졌습니다.

1973년 11월 20일에는 카톨릭교회 청년 연합 예배 후에 5명이 연행되고 그 다음날에 또 4명이 잡혀 갔습니다. 25일간 구류되었다가 나왔습니다. 구속되었던 수십명 서울 대학생들과 다른 대학생 몇 명도 25일간 구류 후에 나왔습니다.

1973년 11월 22일에 카톨릭 청년 일동이 정보부의 교회 사찰 중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1973년 11월 25일에 독일에 있는 한국기독자 유지 일동이 15인 민주선언 지지성명을 냈다는 것을 후에 알고 격려되었습니다.

1973년 11월 28일에는 이대생 3천명이 방과 후에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같이 꾸미고 시청 앞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다가 약속한 시간에 갑자기 거리에 나서 대열을 이루어 ‘데모’한 일이 있습니다.

1973년 11월 28일에는 KSCF ‘기독학생연합회’ 연합기도회가 새문안교회에서 모였는데 김찬국 교수의 구약 예언자 강의를 듣고 헤어질 때, 약 38명이 횃불 데모로 광화문까지 나오다가 경찰에 저지되고 18명이 연행되었습니다.

같은 날에 KSCF의 기도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이튿날인 1973년 11월 29일에는 감리교 신학교 학생들이 찬송행진을 하다가 저지되었습니다.

1973년 11월 30일에는 중앙일보 기자 주동으로 민주언론 자유를 위한 기자들의 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문학인들의 자유민주 선언도 발표되었습니다.

1973년 12월 3일에는 감리교 도시 산업선교 성직자들의, 근로자 생활태 현상 보고와 근로자 권익보호를 위한 주장과 그들의 행동강령 및 결의문이 발표되었습니다.

1973년 12월 5일에는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알선으로 정계, 학계, 교계 등 각계의 원로 회의가 YWCA 알로하실에서 열렸습니다.

출석자는 백낙준, 윤보선, 이인, 김홍일, 유진오, 함석헌, 이희승, 김정기, 김수환 추기경, 이병린 변호사, 한경직 등이었습니다. 한경직은 도중에 나가고, 좌장은 백낙준이 호청되었습니다. 이 원로들은 시국간담회에서 유신헌법을 민주헌법으로 고치라는 건의서를 내고 ‘박’ 씨와의 면담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건의서 작성위원으로는 천관우, 유진오, 김재준 3인이 위촉되었고 면담위원으로는 백낙준, 김수한, 유진오, 함석헌, 이인의 5인이 선정되었습니다. 건의서 제출이 가결되기까지 여러 가지 의견이 토의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헌법 자체를 무시하고 드는 무법자인데 민주헌법이니 뭐니하고 건의할 따위가 있느냐? 그 사람 자체가 처치되는 것 만이 유일한 대책일 것이다…” 하는 얘기도 나와서 다들 “사실은 그렇다”고 동감을 표시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법’의 정당성에서 사는 민주질서를 밟아야 한다”는 것으로 낙착되었습니다.

1973년 12월 10일에 우리는 원로 회의에서 합의된 대로 건의문을 작성하여 신중 검토하고 면담 신청서와 함께 대통령 비서실장을 통하여 직접 대통령에게 전달했습니다.

확실히 비서실장에게 접수되고 신문에 기사로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 1월 8일에 갑작스레 소위 ‘긴급조치령’이 선포되어 민주활동은 전적으로 매몰상태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화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아마도 우리 건의에 대한 대답인 것 같다 하고 쓴 웃음을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1973년 12월 16일에 열린 카톨릭ㆍ프로테스탄트 연합예배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자유민주의 회복을 역설했습니다. 예배에 출석했던 카톨릭 학생 200명이 가두 ‘데모’에 나섰다가 연행되었습니다.

1973년 12월 16-22일까지 프로테스탄트 젊은 성직자 28인이 한 고장에 모여 단식 기도회를 계속했습니다.

6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안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12월 16일 단식을 시작하는 날에 제1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정부의 비민주적 강압정책을 중지할 것과 일본에의 경제예속, 공해산업 수입, 한일각료회의 중지 등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6일 이전 체제로 환원할 것과 한국 부유층의 서민생활화, 국민생활의 검소, 내핍, 절제 등을 호소했습니다.

제2선언에서는 자신들의 참회를 고백하면서 악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를 바랐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고백했습니다.

제3선언에서는 그들의 민주 확신과 결의를 표명했습니다.

22일 폐회하는 날 정오에 발표한 제4선언에서는 인간 존엄과 민주건설에서 십자가를 질 결의를 말하고 다가오는 성탄을 승리와 용기, 수난과 위로로 맞이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 이틀 후인 1973년 12월 24일에 장준하 씨 주도 아래서 100만인 개헌 청원 서명운동이 시작되어 ‘요원의 불’과 같이 퍼졌습니다. 그대로 나간다면 한달 안에 100만을 훨씬 넘을 것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화당의 원로요 상징적인 인물이라는 정구영 옹이 공화당을 탈당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전국적인 항쟁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폭발이 눈 앞에 다가온 것 같은 정세였습니다. 박정권도 그런 것을 느낀 것 같았습니다.

1973년 12월 26일에 김종필 국무총리는 90분간에 걸친 T.V.연설을 방송했습니다. 개헌서명 운동은 체제변혁 운동이기 때문에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것과 그 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민주운동 인사들은 일소에 부쳤습니다. 모든 국가악과 사회악이 현 체제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현 체제를 건드리지 않고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 정부 수반 자신의 권력구조를 절대화하고 국민은 복종만 하라는 것이 시종일관된 고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진영에서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3년 12월 29일에 한국기독교 학생회 총연맹(KSCF) 총회에서 ‘기독학생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선언에서 자유민주제 건설, 반일구국, 서민권리 옹호, 언론 학원 종교의 자유, 마침내 1974년 1월 8일에 ‘긴급조치령’이라는 것이 선포되어 전적인 탄압정책이 실시되었습니다.

1974년 1월 9일부터 학생들은 연금되고 민주적 저명 인사들은 대부분 자택에 감금되었습니다. 1974년 1월 10일에는 KSCF 사무실이 수사되어 문서류와 자료가 압수되었습니다. N.C.C. 김관석 총무와 제일교회 박형규 목사, 그리고 오충일, 조승혁, 김상근, 김정렬 등 젊은 교직자들이 24시간 감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1974년 1월 15일에 장준하 씨와 백기완 씨가 검거되어 15년과 10년 징역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10인의 젊은 목사들이 N.C.C. 사무실에서 “하느님의 뜻과 한국의 현실”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의 신앙고백을 발표했습니다.

개헌 자유 토의와 민주질서 회복은 한국의 현실에서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신앙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일 후인 1974년 1월 21일에 이 젊은 목사들은 정보부에 연행되었습니다.

1974년 2월 5일에는 문인들 중에서 5명이 구속되었는데 이호철 등 작가 2명과 이헌구 등 평론가 3명이었습니다. 그들을 반공법에 걸어 스파이 혐의로 다루려 했었다고 들었습니다.

1974년 2월 6일에 6명의 목사가 모여 긴급조치령 철회를 공적으로 요구했는데 그 중 김경낙 등 2인은 10년 징역, 4인은 석방되었습니다.

이들이 군사재판을 받을 때 그 추운 바깥에서 80명의 기독교인이 옥외연좌를 했습니다.

수일 전에 들은 대로는 내가 본국을 떠나던 3월 12일은 옛날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방위사령부 군인들로 서울거리는 살벌 그것이고 물가는 양등하고 민심은 극한을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그래도 “국민의 뜻이라면……” 하고 맨발로 청와대를 나오는 극적인 결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만, 지금 그에게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습니다만, 사실 보고 만으로 벌써 시간은 훨씬 넘었습니다. 한국에서 학생과 교계 인사들이 어떻게 자유 한국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좀더 여실하게 전달해 드릴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흔히 듣는 말로서는 국내에서 일어나야 국외에서도 힘을 낼 것이 아니냐? 합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린 것만으로도 국내가 게으르고 무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 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박정희 씨는 걸핏하면 15년 징역을 선고하는데 15년이란 숫자가 어떻게 산출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박’ 씨가 50대를 넘은 나이니까 15년이면 65세에서 70세에 가까운 연령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평생 대통령으로 정착할 심산일지 모르겠습니다.

10년이고 15년이고 간에 독재정권이 계속되는 한, 자유민주 운동은 계속할 것입니다. 15년이고 30년이고 자유가 올 때까지 자유의 깃발은 내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우리가 당장 해외에서 할 일은

[1] 사신(Message) 교류(Communication)
[2] 격려(Encouragement)
[3] 지지(Support – 지지성명 발표)
[4] 협동(Cooperation)
[5] 동참(Participation)입니다.

1974년 5월 8일 (수) 와싱톤 강연
Catholic 대학 간호학교 강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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