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9일 월요일

[범용기 제6권] (1605) 크리스찬 가정 – 어머니 주일

[범용기 제6권] (1605) 크리스찬 가정 – 어머니 주일

인간이 혼자서 살 수가 없고 서로 어울려 사회를 이루어야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라 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전 인류를 자기와 이웃되게 하는 이웃사랑의 제단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인간 사회화”의 활역소라 하겠습니다. “가정”은 “인간사회화”의 ‘핵’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해서 ‘하와’와 연합하게 했습니다. 아담은 외로와 못 곁디던 터에 ‘하와’를 만나 “이는 내 살의 살이요 뼈의 뼈다” 하며 그녀와 한몸이 되었다고 창세기에 쓰여 있습니다.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몸이 된다”고 예수도 말씀하였습니다. 지금은 여자가 그 부모를 떠나 남편과 한몸이 된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그 사회의 풍습에 따라 양식이 다른 것 뿐이고 ‘한몸’ 되는 진리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결혼’의 선언입니다.

결혼에 의하여 ‘가정’이 성립됩니다. 거기에서 자녀가 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 딸”이라는 3위가 하나로 됩니다. 이것이 요새 말하는 ‘핵가족’입니다. 옛날 동양에서는 ‘대가족’ 제도가 성했었습니다만, 지금은 ‘핵가족’ 제도가 ‘가정’의 정상적 단위고 정립됐습니다.

‘크리스찬 가정’도 핵가족 제도를 정상태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인간사회화’의 원형(Proto-Type)일 뿐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존재양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로 한몸을 이룬 분입니다. 성령은 ‘어머니’ 구실을 합니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가정”은 하느님 자신의 존재양식에 근거한 종교적인 ‘제단’이라 하겠습니다.

인류사회의 최고 이상인 하느님 나라 양식도 가정적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전인류가 형제 자매로 되고 성령이 ‘어머니’로 화육(化育)하는 사랑의 공동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죄악의 부조리가 없고 의로운 사랑만이 차고 넘칩니다. 거기에는 사망이 없고 오직 생명만이 솟구쳐 흐릅니다. 각 사람의 심장이 생명의 샘터가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 뜻이 땅 위에 이루어진 때의 전 우주적 가정 양태입니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가정은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화(化 )해지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가정 문제가 육법전서로 재판하는 법정에 제소되거나 가장 Trouble이 경찰의 압력으로 진정되거나 한다면 그 가정은 숙박소일지는 몰라도 Home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이란, 자칫하면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것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게 됩니다. 크리스찬에게는 그런 일이 덜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그럴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공동체가 있어서 돌봐주고 목회자가 있어서 상담 선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기라”, “시험에 걸려들지 말고 다만 악에서 건져지이다”하는 염원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은 어머니 주일입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하느님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가정의 여왕(Queen)입니다. 아버지는 그 직장이 밖에 있기 때문에 대외관계의 편의상 ‘아버지’가 호주로 있게 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가정’은 내적인 Privacy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정 안에서는 ‘어머니’가 주인이며 ‘여왕’인 것입니다. 가정은 ‘법’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다스려진다고 했습니다만, 그 사랑의 원천은 어머니에게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대하는 사랑,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하는 사랑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자녀들이 자라서 늙기까지 조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어머니’의 ‘이미지’인 것입니다.

오늘도 ‘아버지 날’이나 ‘부모의 날’이 아니고 ‘어머니 날’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들에게는 좀 섭섭하고 불만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머니 날’로 제정된 것은 인정의 Spontaneous한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사랑이란 것은 주체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객관화하여 분석하고 설명하고 하노라면, 그 생명이 발산해 버리고 형태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이 어떠하다는 것을 누누이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설명 듣기 전에 여러분은 벌써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것은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서로 주고 받고 해야 영속합니다. 상대방에서 나를 사랑해도 내가 그를 사랑할 수 없으면, 상대방의 사랑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진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일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성서는 증거합니다.

자녀가 불효해도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것은 일방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입니다. 남녀 사랑에도 ‘짝사랑’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비극입니다. 서로 교류돼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사랑도 서로 교류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오고 가고, 주고 받고 하면서 즐겁고 자유롭고 자랑스럽고 자라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마치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 속담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되지만,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은 교양을 필요로 합니다. 전자도 물론 교양이 있어야 바른 사랑이 되겠습니다만, 후자의 경우가 더 절실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어머니 주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머니 주일은 어머니를 위해 있다는 것 보다도 자녀들의 교양을 위해 있다고도 하겠습니다.

동양윤리에서, 가정 윤리를 가장 강조한 것이 유교였습니다. 유교는 부모에 대한 자녀의 ‘효도’를 근본으로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자학파’ 소위 ‘신유교’ 시절부터 너무 형식주의적 ‘바리새’ 형태로 변질했습니다.

부모 앞에서는 머리 숙이고 꿇어 앉아야 한다. 잘 때에도 다리를 펴고 자서는 안된다. 부모가 병석에 계실 때에는 그 옆에서 철야 시중해야 한다. 밤에는 자리 펴드리고 “안녕히 주무십시오” 큰 절, 아침에는 자리 거두고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큰 절, 마실을 아갈 때도 “어디갔다 오겠습니다” 큰 절, 돌아와서는 “다녀왔습니다” 큰 절, 더군다나 상례, 제례 때의 그 번쇄한 예절은 서양 중세기 ‘번쇄철학’을 능가할만큼 ‘번쇄의례’적이었습니다.

결국 허례허식이 ‘사랑의 자유’를 질식시켜 버린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허례허식’만 남았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지켜낼 수 없다고 절규한 것과 같이 한국이 유교에서는 이 ‘효도’와 에절을 지켜낼 수 없다고 탄식할 밖에 없었습니다. 나도 그 당시 소년이었습니다만, ‘효도’는 못하는 것으로 단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그런 번거로운 율법 조문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심정(heart)을 가지라고만 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너희는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 십계명에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느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네가 오래 살리라”(제5계명) 했습니다.

성경에는 ‘효도’란 낱말은 없습니다. ‘순종하라’, ‘공경하라’ 했습니다.

부모된 사람이 자기는 잘못한 일, 잘못하는 일이 많아도 자녀에게까지 자기 잘못을 물려줄 생각은 없는 것이 사실이겠습니다.

그럼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자녀에게 좋은 유산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새는 사회풍조가 너무 급변하기 때문에 자녀들의 새 시대 적응도 ‘급텐포’로 진행됩니다. 부모에게 순종한다면 낡은 세대와 함께 몰락할 것 뿐이라는 생각에서 기성세대에는 덮어 놓고 반항하는 것이 낫다고 단정합니다. 지나간 세대를 이어간다는 것 보다 그 세대에서 단절하는 것을 택하려 합니다. 단절 자체가 새 세대에의 자유로운 출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세대는 ‘無’에 돌리고 온전히 새로 Start한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無’에서 출발하는 법은 없습니다. 과거의 오래고 오랜 유전과 문화 속에 잉태되어 열 달 지나면 세상에 나옵니다.

가정이란 사랑의 보금자리여서 부모님 덕분으로 자라고 교육받고 그 기초 성격을 구성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새 세대라 하더라도 과거에서 온전히 이탈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과거에 맹종하지 않고 그것을 비판하여 현재에 살리고 버릴 것은 버리는 선택의 행동이 있을 것 뿐입니다. 그리고 미래 지향적인 입장에서 현재를 미래 건축에 사용하는 지혜를 행사해야 한다는 정도의 것이겠습니다.

과학ㆍ기술학적 세계에서는 기술학이 인간의 이상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학 자체가 자동적으로 미래를 창조해 간다고 믿기 때문에 “이상주의”는 “무용지물”이라고 믿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건 진리의 전부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역시 그렇게까지 기계적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순종하라”는 오늘 본문에서도 ‘무조건 맹종’이란 시사는 없습니다. “주 안에서”라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적인 교류 안에서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찬 가정에서는 그것이 이미 세워진 생활 원칙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되고 실천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의 의지와 자녀의 의지가 각기 다른 점을 갖고 있지만 “주님의 뜻”이라는 제3의지에 둘이 연합하여, 그 더 높은 제3의지에 따라 두 의지가 합동하여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찬 가정이 성소요, ‘제단’입니다.

부모가 자기들의 권위주의를 자녀에게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즉 주님 사랑 안에서 자녀와의 공통의지를 발굴하는 것입니다. 자녀도 덮어놓고 순종하거나 덮어놓고 반항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부모와의 공통의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도 자녀도 노엽지 않은 것입니다.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도 있으니 말입니다. 자녀를 욕하거나 고래고래 역정을 낸다거나 저주한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금물’입니다.

요새는 가정에서 노인과 젊은 세대와의 동거가 어려운 문제의 하나로 등장합니다.

핵가족 제도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만, 완전 해결은 아닙니다.

핵가족 제도에 있어서도 3대가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이상으로 한답니다. Trueb Iood는 그것을 적극 권장했고 Margaret Mead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부모와 자녀’라는 두 ‘대’만의 핵가족은 너무 단조롭고 메마르다는 것입니다. 특히 부부가 함께 직장에 나가는 가정에서는 그 어린 자녀들, 또는 10대 소년 소녀로서의 자녀들을 보육하는 것이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경우에 할아버지는 몰라도 “할머니”는 그 가정에 남아 있어서 주부의 집안일도 도와주고 애들도 봐주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손주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하는 역할을 맡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대로,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긴 것 같습니다.

인간적으로 노인은 노인 대로 ‘연륜’의 중량이 있고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비전’과 활력이 있습니다. 남자는 남자로서의 ‘의지력’(will power)이 있고 여자는 여자로서의 아름다움과 감칠 맛이 있습니다. 총명하고 gracious합니다.

이런 각기 다른 특색과 인간조건이 가정 생활에서 다채롭게 사랑으로 조화를이루어 즐겁게 봉사하는 것이 인생 사막의 ‘오아시스’인 것입니다.

3대가 모두 교양과 이해와 사랑으로 어울리는 것이 행복의 샘터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My Home” 주의가 크리스찬 가정의 전부는 아닙니다. 크리스찬 가정은 교회와 사회를 섬기고 세계에 공헌하는 ‘핵’이 되는 경우에 참으로 권태없는 생명체로 영원히 발전 결실하는 것입니다. Albert Schweitzer는 자기 집을 설계하면서 “출입구는 거리를 향하여”라는 원칙을 세웠다고 합니다. 정치적으로도 “My Home”주의는 독재자에게 무풍지대를 마련해 줍니다.

어떤 기관이나 단체나 교회도 그 자체가 그 존재의 목적인 경우에는 폐쇄 위축합니다. 오래 가면 ‘화석’이 됩니다. 가정도 그렇습니다. 크리스찬 가정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이 땅 위에 임하게 하기 위한 ‘못자리’입니다. 넓은 논밭에 ‘모내기’를 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한 미래 인물을 그 요람과 무릎 위에서 기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주일’에 하느님의 축복이 어머니들에게 풍족하게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1973년 5월 13일 2PM
어머니 주일
토론토 한인 연합교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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