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9일 금요일

[범용기 제5권] (120) 동경에서 – 新彊(신강)의 流謫者(유적자)

[범용기 제5권] (120) 동경에서 – 新彊(신강)의 流謫者(유적자)

西藏(서장) 靑海等(청해등)은 고비사막의 본고장이다. ‘고비’란 말은 ‘자갈’(Gravel)이란 뜻이라 한다. 해수욕장의 금모래, 은모래, 세모래 등 부드러운 낭만의 고장은 아니란 말이겠다.

‘자갈’로 깔린 끝없는 빈들이 중국에서는 거기에 ‘도독’을 두고 될 수 있는대로 자치를 허용하면서 前線(전선)의 基地(기지)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天子(천자)가 자기 뜻에 거슬리는 고관이나 重臣(중신)들을 귀양보내는 땅으로도 써 왔다.

가담가담 ‘오아시스’가 맑은 호수로 갇혀 있다. 강물도 흐른다. 자갈벌판이라지만 철따라 풀이 푸르고 白草(백초)라고도 하는 사총(砂怱), ‘모래마을’이랄까가 자갈 틈에서 하얗게 숨쉰다. 그 잎을 뜯어 삶아 먹기도 하고 김치처럼 담가 먹기도 한다.

중국 근대사 중에서, 천년 묵은 ‘체증’이 밀려 나간 듯 통쾌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아편금절(絶)을 위해 廣州(광주)에 파견된 欽差(흠차) 대신 林則徐(임칙서)가 廣州(광주)에 주재하던 雨廣(우광) 總督(총독)과 합작하여, 영국상인 소유인 아편 2만여 상자를 몰수하여 虎門(호문)밖에서 태워버린 일일 것이다. 이 용감한 처사 때문에 林則徐(임칙서)와 鄧延楨(등연정)은 이 고비사막의 新彊(신강)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두 분이 다 60을 바라보는 노쇄기 연력이었다. 혈혈 단신으로 이 자갈벌판에 자갈처럼 던져진 것이었다. 떨어진 넝마를 걸치고 영상 50도의 고열과 영하 30도의 혹한을 날마다 번갈아 당하면서도 그들은 ‘詩’(시) 한편 출생하여 숨가쁜 ‘혼’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들은 사람 하나씩 밖에 통과 못한다는 ‘옥문관’을 나왔다. 진짜 황랑한 변방이다. 시성(詩聖) 이태백도 고향이 ‘서역’이었다고 한다.

그 시의 한 구절 :

明月出天山 蒼茫雲海間
長風幾萬理 吹度玉門關

밝은 달 天山을 나와
아득한 雲海에 뜬다.
長安바람, 몇만리련가
불어 불어, 옥문관에 온다.

이것은 두고 온 처자들이, 귀양간 李白 자신을 그려하는 ‘혼’의 바람이 이 옥문관까지 불어온다는 뜻이다. “天山”은 天山山脈이 아니라 祁連山脈이라고 註했다.

이 短章(단장)의 주인공인 林則徐(임칙서)는 옥문관을 나와 고비사막에 접어들면서 이런 시를 읊었다.

我來別有征途感
不爲哀齡盼賜環

내가 여기 온 것은
쫓겨온 귀양살이 아니다.
늙어 쇄잔한 몸이긴 하다마는
임군님 사면장은 바라지도 않는다.

環(환)이란 것은 임군님이 보내는 옥가락지로서 용서한다는 표로 쓴다.

그때 林則徐(임칙서)는 58세, 西安(서안)에서 한달동안 앓다가 겨우 일어난 무렵이었다.

의인의 의기를 본다. 그러나 憂國(우국)충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동범’(同犯)인 雨廣(우광) 총독 鄧延楨(등연정)에게 보낸 詩牒(시첩)의 한 구절

絶塞仍期促膝談
只憂烽火江南照

사람 기척 끊어진 이 변방에서
무릎 맞대고 얘기하고 싶지만,
봉화가 강남을 비췰까 싶어
걱정이 태산 같소이다.

이것은 영국 함대가 양자강을 올려칠까 걱정스럽다는 뜻이다. ‘봉화’(烽火)는 산 위에서 횃불을 들어 중앙에 급보하는 System이다.

결국 정부에서는 선견자인 의인들을 수만리 바깥 ‘서역’에 귀양 보내고 굴욕적인 북경조약을 맺었다. 그래서 동양의 ‘종주국’은 서양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시국은 어쩔 수 없이 기울어져서 ‘봉화’는 ‘강남’을 비쳤다. 그러나 ‘의인’은 좌절없이 사막을 간다.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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