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9일 금요일

[범용기 제5권] (119) 동경에서 – 허(虛)

[범용기 제5권] (119) 동경에서 – 허(虛)

‘코헬레드’는 헛되고 헛되어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것은 출구없는 순환이다 하는 말로 시작한다. 이것은 ‘존재’ 자체가 ‘無’(무)란 말이 아니라, 그 존재의 ‘의미’가 무요 따라서 그것이 허무하다는 뜻일 것이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 복이 있다”고 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탐욕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물욕’, ‘명예욕’, ‘지위욕’ 등등이 마음 속에 ‘초만원’으로 비좁게 찬 사람은 心貧者(심빈자)랄 수 없겠다.

마치 ‘위’에 가스가 찬 것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이웃이 앉을 자리도 없고 하나님을 모실 성도도 없다.

자기 욕심과 사람들의 신뢰와는 정비례로 되는 것 같다. 자기 욕심이 없는 분일수록 사람들이 믿고 따른다. 예수에게는 티끌만한 ‘사심, 사욕’도 없었다. 그렇길래 2천년 전 그를 몸으로 보며 따르던 12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2천년 후 그를 보지 못하고서 따르는 제자가 억만으로 늘었다. 갈수록 늘 것이다.

혹시는 Demonish한 권력에 눌려, 숨는 자, 탈락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가난한 대신에 불안하다. 일본의 덕천(德川幕府)가 기리스단 금교령을 내렸을 때, 순교자도 많았지만 지하에 잠복한 신자가 더 많았다. 땅 속의 두더쥐는 잡히지 않았다. 그들은 몰라보게 변장한다. 카멜레온같이 변색한다. 그러나 명치 황제가 신교의 자유를 새헌법으로 발표할 때 하루에 6만명(?)이 조상대대 크리스찬으로 등록했다는 것이었다.

크리스찬 신앙은 ‘코헬레드’의 바람잡이가 아니다. 무의미한 ‘숙명’의 ‘윤회’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 꽂힌 ‘전능자’의 사랑이다. 그것은 땅에서 하늘에의 사랑의 응답이다. 그것은 사랑에서 불멸의 의미를 본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느님의 충만하심이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빈다(엡 3:19)고 바울은 권면했다.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비어 있지 않다. 사랑의 기쁨으로 차고 넘친다. 우리의 삶은 허무가 아니다. 모든 것이 다 가도 사랑은 영원하다. 주는 사랑, 받는 사랑, ‘삶’ 자체가 사랑 안에서 영원하다. 죽음은 이 삶 속에 포섭되어 ‘무력자’가 된다. 죽음은 부활에의 ‘서곡’을 연주한다. (198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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