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5일 월요일

[범용기 제5권] (79) 北美留記(북미유기) 第8年(제8년) 1981 – 친교와 증언

[범용기 제5권] (79) 北美留記(북미유기) 第8年(제8년) 1981 – 친교와 증언

3월 13일(금) - 저녁식사는 명휘재 장로 내외분이 구 장로 댁에 초청되어 함께 식탁의 친교를 가졌다.

구 권사 오빠되시는 분도 식사에 동참했다.

그는 대규모의 양어장 시설에 바쁜 기업가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신학의 진수도 파악하고 있다. 교계 동정에 아낌없는 비판을 내린다. 잘난 쾌남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후에 구 권사에게서 들었지만 그는 대학에서 신학도 다 마쳤는데 저렇게 낭인(浪人) 노릇만 한다는 것이었다.

3월 14일(토) - 이석재 장로가 그의 둘째 따님 댁에 만찬을 차리고, 이창식, 구희영과 나를 초대했다. 그분의 겸손한 동지애는 변함이 없다.

3월 15일(일) - 11:00 AM에 ‘선한 사마리아인교회’에서 설교했다.

홍동근 목사가 섬기는 교회다. 설교제목은 “사랑의 차원”이라 했다.

예배를 끝내고 차상달 선생 내외분과, 출장중에 들린 N.Y.의 이승만과 ‘장공’ 네 사람이 다점에서 담화하고 있었다.

교회의 예배사무를 마치고, 홍동근 목사가 숨가쁘게 달려와서 5인이 동석했다.

교회일, 사회일, 본국 소식 등에 말은 끝이 없다. 당장 떠나 차로 달려도 내 강연시간에 맞춰갈까말까한 시간이 됐다. 부랴부랴 떠났다.

가까스로 ‘지각’은 면했다.

이 강연은 해란교회 주최로 열린 “평신도를 위한 신학공개강좌 제1회”로 광고됐다. 연제는 “예언자의 성격과 사명”이다. 이것은 주최측으로부터 주어진 제목이다.

한시간 반 강의했다. 내 전문분야니까 ‘연출’에도 어색하지 않았다. 청강자 약 200명 – 실패작은 아니었던 것으로 자부해 보기도 한다.

어느 한국어 신문에 전문이 소개됐던 것 같다.

밤에는 명휘재 장로 댁에서 만찬에 불러줬다. 언젠가 써 드린 “精華‘(정화)란 내 작은 글씨가 소중스레 서재 구석에 걸려 있다.

기억에도 없는 내 글씨를 보며 놀랬다. ‘장공’이라 도장까지 찍혔으니 내 글씨임에는 틀림없겠다.

지필묵을 정성껏 준비해 놓고 이번에도 글씨를 청한다. 명 장로와 동석한 김세환 장로에게도 한 폭씩 써놓고 나왔다.

3월 15일(일) - 맑다. L.A.에서도 풍경으로 자랑스러운 ‘비이취’바로 가장자리에 홍동근 목사가 맡은 ‘선한 사마리아인 교회’가 있다.

거기서 오전 11시 예배에 설교했다. 아담하고 정결스런 교회당이다.

내가 거기 온다는 소문이 퍼져서 한신동창들, 도농 이춘우네 식구들, 경동교회 옛교인들, 그리고 이번 기회 아니고서는 다시 만날 것 같지 않다고 기를 써 찾아온 후배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부부끼리 애기 안고 큰 애기는 손목잡고, 다들 모여와서 회당이 그득 찼다. 모두모두 반가왔고 반가와했다.

3월 16일(월) - 손순렬 목사 교회에서 고 김정준 목사 추도예배가 있었다. 손순렬 목사는 한신 제2회 졸업생이니까 L.A.지방에서는 제일 앞선 선배 동창일 것이다. 제1회 졸업생인 장희진 목사가 있지만 그는 SF에 정착해 있다. 그러나 장 목사 내외분도 김정준 박사 추도예배에 참석하려고 먼길을 날아왔다.

손순렬 목사는 건축업자 신세없이 자기 손으로 설계해서 자기끼리 합심노력, 아담한 교회당을 세웠다. 도중에서 뜯어 고치고 고치고 하다보니 이제까지 손 안닿는 가려운 데가 없을 정도로 자상하게 쓸모 있다.

오전 열시에 그곳에서 한신동문회 주최로 동창과 친지들 20여명이 모여 추도예배를 드렸다. 순서는 신창윤 목사 사회, 노별수 목사 추모가, 손순렬 목사 설교, 이창식 목사 약력 보고 등등이었고, 나에게는 ‘교수’로서의 회고담을 하라고 했다. 마침 한신 동창중 시인 목사로 현재 창현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김경수 목사가 임시 방미중 이 모임에 들러 자작 추모시를 낭독해서 인상깊은 흐느낌이 장내에 잔물결을 흔들었다. 아래에 그 추모시를 넣는다.

김정준 교수는 목회자, 신학자, 문필가, 교육자였다.

어떻게 눈을 감으셨습니까

지금은 남의 나라인 이 땅에도, 우리의 잔뼈가 굵어지고,
우리의 고운 숨결이 담겨진
우리의 조국에도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 딸들
사랑하는 조국과 교회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습니까.

한국에서도 서울
서울에서도 한국신학대학
교회 중에 교회를 지향하는 우리들의 교회
우리들의 신학의 터전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습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땅이 꺼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핍박이 심하고
내가 설 땅이 없다고 해도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교회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습니까.

슬플 때는 같이 슬퍼하고
기쁠 때는 같이 기뻐해야 하는
우리들,
휘영청 밝아오는 조국의 밝은 아침을
먼 앞에 두고

생각하면 할수록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우리 모두 흐느껴 웁니다.

저는 어젯밤 이곳(미국땅)에 와서
그립고 그립던 김재준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금년이 81세인데도 그 목소리하며 얼굴 표정하며
몸짓 하나하나가 어쩌면 옛날 그대로입니까.

그런데 김정준 목사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목사님을 좋아하며 진심으로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 우리가 보입니까.
내 목소리가 들립니까.
너무나 허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님이 못하신 일을 우리가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꽃도 피우고
자유의 바다도 출렁이게 할 것입니다.

목사님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교회와 조국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모두가 정의의 아들들이 되도록
우리 모두가 자유의 딸들이 되도록
우리 모두가 빛의 아들, 빛의 딸이 되도록

이제 우리는 울지 않습니다.
떳떳이 늠름하게, 힘있게 살아갈 것입니다.

나의 조국에서, 이방 지대에서
우리의 고마우신 스승이여
고이 눈을 감으소서.
고이 잠드소서

1981년 3월 16일 로스앤젤레스에서
김경수

장희진 목사는 오랜 세월 어쩌다 만난 나와 오순도순 얘기할 틈도 없이 훨훨 떠나기가 아쉬워, 구 장로 댁에까지 함께 와서 밤새가며 고담, 진담, 충고, 조언 등등 친구로서의 할 일을 다했다.

동녘하늘이 훤해지자, 눈을 붙일락말락, 일어나 갔다.

3월 17일(화) - 청명한 날씨다. 옛친구 김성락, 김형식 두 분이 나와 구회영 장로 부부를 올림픽거리 ‘새마을’ 한식점에 초대해 줬다.

오후에는 ‘경동교회 할머니’라고 불리우는, 신앙과 지혜와 명철이 천성처럼 갖추어진 ‘최옥명’ 권사의 묘소에 성묘하러 갔다. 최할머니가 혼자서 애지중지 길러 교육시킨 외아들 양준철 박사는 지금 L.A.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외과수술의 명의란다. 그는 개업의로 호화롭다는 것이다.

최옥명 권사는 1906년에 나서, 1979년에 세상 떠났다. 나는 장례에도 참여 못했고 외아드님인 준철 박사에게 문상도 못했기에 이번 기회에 성묘도 할 겸, 아드님에게 뒤늦게나마 문상도 할 겸 교회 친구에게 전화연락을 부탁했다. 숨겨진 전화번호여서 전화국에 특별 요청을 했다. 전화국에서 여기 전화번호를 양박사에게 통고했다. 양 박사가 30분 안에 이쪽 전화번호에 통화해주면 성공적일 것이라고 한다. 30분, 한 시간 지나도 감감소식이다. 결국 단념하고 우리끼리서 꽤 먼 묘소를 찾아간다. 구 권사가 장례식 때 기억을 더듬어 두루 헤메다가 맨드름이 서 있는 외그루 단풍나무를 푯대로 중턱쯤 올라가서 찾아냈다.

작은 꽃 한묶음 들고 가서 묘 뚜껑 위에 놓고 기도하고 떠났다. 묘소 앞에 꽃꽂이도 없었다. 마감날에는, 예수 따라 부활할 몸인데 무덤치례 무슨 소용이냐 하며 용서하고 누워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최 권사의 인사고 아들ㆍ며느리 인사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어딘지 서글펐다.

오후에는 일본 거리 가까이서 목회를 시작한, 은진 동문이고 감리교 신학 출신인 김충국 목사가 차상달 선생과 함께 나를 한식점에 청하여 만둣국 먹으며, 시국담 무궁무진.

밤 되어 구 장로 댁 내 방에 돌아와 누우니 보름달이 유난스레 밝다.

3월 18일(수) - 구 장로 내외분과 함께 조반 전에 Long Beach 해수욕장을 달렸다. 이름 그대로 ‘긴 해안’이다. 자동차로 한 시간 이상 달려야 끝나는 긴 백사장이다.

돌아오는 길에 올림픽 호텔에서 내 집안 구촌 조카딸과 그의 남편 장성남을 만났다. 둘다 문선명파 독신자로서 L.A. Moonism 담당목사로 임명돼 왔노라 했다.

그 길로 유형기 박사님을 예방했다. 점심을 차려놓고 기다리셨다. 사모님 떠나시고 단 혼자서 옛집에 계신다. 86세지만 장하게 깨끗하게 늙으시는, 내게는 극진한 선배시다. 성자같은 얼굴이다. 그렇게 반가히 맞아주시고 그렇게 작별을 섭섭해 하실 줄은 미쳐 몰랐다. 지팽이 짚고 집안을 거닐 정도시다. 단권성경주석사건으로 고생을 나누었었다는 우리끼리의 ‘의리’(?)가 노경에 더 돋보이시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목회 목사들에게 도움되는 책들을 계속 써내고 계신다. 국내 감리교출판부에서 낸다고 했다. “판권은?”하고 물었더니, “나는 책 나오는 것만으로 족하다. 판권같은 건 염두에도 없다”고 한다. 그전에 단권성경 주석 재판, 심판(?) 때에는 감리교 교육국과 다소 알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속됨을 넘어 ‘거룩’의 지역에 가까이 오신 것이 아닌가 느꼈다.

이창식 목사가 찍은 기념사진 몇 장이 있어서 감회 새롭게 들여다 본다.

3월 19일 – 비 내리는 날, 오전에는 구 권사 부탁의 ‘병풍글씨’ 9폭을 썼다. 오후에는 김원규 장로 아드님 성복 씨가 아버님 대신으로, ‘디즈니랜드’에 구회영 부부와 이 목사와 나를 초대했다. 그전보다 몇곱절 구비된 유원지다. 저녁은 성복 씨가 일본요리를 대접해 준다.

비는 그칠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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