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5일 금요일

[범용기 제5권] (37)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NY에서

[범용기 제5권] (37)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NY에서

80년 5월 28일(수) - 나는 와싱톤에서 동박사와 작별하고 N.Y.에 가서 최우길 장로 집에 유숙한다. ‘유숙’이라기보다 ‘유련’(留連)이다. 최 장로는 사회사업 전공이고 그 한가지 일에 헌신했다. 쉴 새 없이 남을 위해 뛰는 사람이다.

거기에 나까지 얹혀 살 수는 없다. 그래도 그 댁에는 나를 위해 꾸민 독방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최우길은 부부가 다 낮 직장에 나간다. 집은 빈다. 자녀도 없다. 그러니까 퇴근시간까지의 그 집은 나의 ‘독무대’다. 배고프면 내 손으로 만들어 먹는다. 게을러서 ‘ 되는대로’지만 굶을 염려는 없다.

최우길은 한신대 출신이다. 그는 첨부터 사회봉사를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서울에서도 서울역전의 구두닦이 소년들을 모아 야간학교를 했고, 넝마주의 소년들과 함께 넝마도 주으러 다녔고, 밤이면 청계천 다리 밑에서 밤을 새는 거지소년들과 같이 딩굴기도 했다.

어떤 관권을 움직여서라도 좋으니 이 소년들을 착취하는 ‘왕초’ 제도를 없애야 하겠다고 서둘렀다. 자기도 광우리를 메고 넝마주이를 했다.

교회 장로로서 치안국 경감인 김재국 씨의 협력을 얻어 왕초들을 제압하면서 선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물론 학비출처가 없다.

내가 첫 번 카나다 방문 때에 유망한 학생을 돕기 위한 장학금 모금 운동을 시도한 일이 있었는데 아직 믿을만한 조직체도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장학제도 운영규칙도 없는 때였기에 성과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스캇 박사가 둘째 아드님인 치과의사에게 말해서 400불인가를 얻어온 것이 있다. 그것으로 우선 최우길의 학비를 도왔다. 최우길은 4년동안 공부를 계속하고 학부졸업까지 할 수 있었다.

그는 N.Y.에 사회사업 Center를 창설하고 총무가 되어 봉사한다. 한편으로 노인들을 돕는 ‘상록회’(常綠會)를 따로 조직하여 그들 심부름에 분주하다. 그는 밤낮 없이 뛴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계속한다.

‘사회사업과’ 학사, 석사 칭호는 가진지 오래다. 이제 박사공부에 착수했다. 그는 반드시 학적으로도 대성할 것이다.

그는 사회봉사 사업에 있어서도 항구한 기록을 남길 것이다. 성격이 부드럽고 대인관계에 반감이나 마찰이 없다. 거슬리는 사건이 생겨도 그는 “지면서 이긴다.”

80년 6월 9일(월) - 토론토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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