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7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95) 野花園餘錄(其四) - 중국에서의 ‘패도’와 ‘왕도’ (2)

[범용기 제4권] (95) 野花園餘錄(其四) - 중국에서의 ‘패도’와 ‘왕도’ (2)

“왕망”의 혁명과 실패

세월가는 동안에 유씨 직계는 안일과 음란 때문에 몸이 약해 수명이 짧아지고 대체로 무능하기도 했다. 그 대신 내척 관계의 타성 사람들은 결사적이었다. 전쟁에는 자원출전하여 공을 세운다. 경쟁자의 질투에 걸려 애매하게 죽는다. 그래도 또 한다. 자기 변호를 위한 설득력도 능숙해진다. ‘상소’, ‘탄핵’ 등을 위한 문장가도 배출된다. 그러나 나라의 ‘뿌리’가 썩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왕망’(王莽)이 혁명에 성공하여 ‘한’(漢) 왕조를 전복시켰다. 그는 ‘이상주의자’였달까, 이미 상공계급이 발달된 시대에, 한 옛날 주(周)나라의 농경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여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는 등 무리를 저질렀다. 뜻대로 안되느니만큼 탄압과 횡포가 늘어간다. 경제가 궁핍하고 민심이 이반된다.

그는 과격파였다. ① 천하의 모든 농지는 ‘왕전’ 즉 임군의 밭이다. 그러므로 그 ‘매매’는 법률로 금지한다.

② ‘노예제도’는 원칙상 폐지돼야 한다. ‘노비’(奴婢)는 ‘사속’(私屬)이라고 부른다. ‘사속’도 ‘매매’는 법률로 금지한다.

③ ‘토지’는 호족(豪族)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그 소유권과 처분권이 ‘호족’들 손에서 고스란이 새여나가 국유화했다. 호족들이 들고 일어난다. 국가경제가 혼란해진다. 빈민들은 비적이 된다.

④ ‘철’과 ‘소금’의 전매제를 실시했다. 이것도 ‘호족’의 기득권 침해였다.

⑤ 중소기업자에게 무이자 또는 저이자로 융자한다. 원래 상공업과 금융업은 ‘호족’들의 본업이었는데 그것이 ‘왕망’에 의하여 국영화할 경향이 짙어갔다. ‘호족’들의 반발이 심할 것은 사실이었다.

⑥ ‘왕망’은 병리연구를 위해 생체(生體) 해부를 명한 일도 있었다.

⑦ 그는 한왕조를 찬탈했기 때문에 ‘한’의 시조인 ‘한고조’의 신령이 자기에게 덮칠까 무서워 ‘고조묘’(廟)의 문짝들을 도끼로 부수고 도탕(挑湯)을 부었다고 한다. ‘도탕’은 귀신쫓는 ‘주법’으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⑧ 요컨대 ‘왕망’의 사회개혁은 일반서민을 위한 호의에서 고안, 실시된 것이었지만, 너무 조급하게 서두른 것 때문에 ‘주먹구구’식으로 되어 ‘설계도’ 없는 건축자같이 허점 투성으로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조령모개’(朝令暮改)여서 일반서민들은 어쩔줄 몰라, 혼란과 불신에 잠기고 생활은 더 곤란하게 됐다. 적미군(赤眉軍)이란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왕망’은 탄압을 강화한다. 무자비한 살육이 강행된다. 결국 ‘왕망’은 ‘두오’(杜吳)라는 상(商)나라 사람에게 몰려 공빈취에게 목이 잘렸다. 각지방의 ‘친왕망파’는 그 지방 사람들에게 살해됐다.

한국의 실정에 맞춰볼 때 남의 일 같지 않아 자못 무연해진다.

댓글 1개:

  1. '왕망'은 스스로 개혁을 주창하였지만... 결국 그 개혁을 뒷받침할 그릇이 되지 못했다...

    이상적인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현 가능한 시스템이 되어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국민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내공이 어느 정도 준비되어야 함)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내세운 개혁이 어떤 것인지를 본인 스스로가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

    단지 개혁을 생각하는 신하의 조언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다가... 오히려 정치를 망쳐버린 조선의 중종 같은 임금이 그 예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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