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7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96) 野花園餘錄(其四) - 중국에서의 ‘패도’와 ‘왕도’ (3)

[범용기 제4권] (96) 野花園餘錄(其四) - 중국에서의 ‘패도’와 ‘왕도’ (3)

後漢(후한)의 왕조부흥

이런 판국에서 전국에 뿌리박은 지배층 ‘왕자’(王者)인 수많은 ‘유방’의 후예가 얌전한 방관자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

‘유방’의 후예에 유수(劉秀)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체구가 장대하고 이목이 수려하여 왕자의 풍모와 위신을 갖춘 걸출이었다. 그는 성질이 부드럽고 처사에 무리가 없는 ‘보오스’였다. 그는 정규군 이외에 ‘적미군’ 10여만을 포섭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그는 ‘낙양’의 대학출신이어서 풍부한 지식의 소유자기도 했다.

왕망의 잔당들도 귀순했다. 그는 ‘왕자’로서는 너무 유순해서 ‘무능’의 평도 받았다. 그러나 한번 ‘단’(斷)을 내리면 ‘준엄’하여 아무도 돌이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광무제’(光武帝)라고 불리운다. ‘선한’(先漢)의 무제(武帝) ‘유철’(劉轍) 때에 조선반도를 점거하고 4군을 두어 통치했었지만 ‘고구려’의 광복운동에 몰려 겨우 ‘낭랑’군(평양)만을 유지할 정도였다. ‘광무제’는 그런 ‘무리’한 일은 계속할 필요가 없다하여 포기해 버렸다. 군사비가 많이 들고 의미도 없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군사행동보다도 ‘회유책’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왕망’의 태도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라 하겠다. 왕망은, ‘고구려’란 국호가 ‘만이’ 즉 ‘야만’의 주제에 건방지다. ‘높을 고’(高)자가 머리에 붙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느냐? 했단다. 그래서 “下句麗”로 고쳐 기록했다는 것이었다. 광무제의 조선반도 포기선언은 그의 ‘무리’없는 정책의 실천이기도 했다. 광무제는 다음 해인 주후 57년에 서거했다.

명군(光武帝)이 간다음 세도가문, 지방장군, 환관정치 등등의 혼란기를 거쳐 삼국지 시대가 전개된다. 조조, 유비, 손권의 각축전에서 조조가 이겼다. 후한 왕조는 유야무야로 꺼졌다.

이상재 영감 말씀마따나 ‘무관정치는 장기게임이고, 문관정치는 바둑두기’다. 둘다 ‘도박’이란 범주 안에 든다.

둘다 권력 싸움이다. ‘역사’는 이 두 ‘북’이 ‘날’과 ‘씨’(Warp and Woof)를 오가면서 짜내는 피륙(Textile)이다. 가장 ‘무리’없고 순조로운 직조법은 자유민주체제다. 그것은 ‘패도’보다도 ‘왕도’에 가깝다. 한반도의 민주통일 회복은 후한의 왕조부흥운동 이상으로 중요하고 그 의미가 심원하다. 자초지종 ‘왕도’적인 길을 걸어야 할 것이 아닐까?

댓글 1개:

  1. 장공 김재준 목사는 중국의 고대 역사 중에서 그나마 후한의 광무제를 성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 이전의 군주들이 너무 형편없어서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착시 효과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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