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1일 금요일

[범용기 제4권] (88) 野花園餘錄(其四) - 난국일수록 같이 당해야

[범용기 제4권] (88) 野花園餘錄(其四) - 난국일수록 같이 당해야

계절이 추워져야 소나무 대나무의 푸름을 안다는 말과 같이 역사에서도 엄동의 풍설이 몰아칠 때에사 진짜 애국자, 지사의 모습이 푸르게 늠름하다.

3ㆍ1 운동 때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를 2천만 앞에 맹세한 민족대표 33인 중 몇 사람이나 “송죽”의 푸름을 그대로 지켰는지! 손병희는 얼마 안 되어 병사했으니 허물할 것 없겠고 한용운은 끝까지 자기 양심과 신앙을 지켰으니 장하다 하겠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독교인은 변절이 아니면 퇴색했다.

해외에 나간 독립운동자들은 어떠하였던가?

상해에 임시정부가 섰다. 처음에는 그 관계로 5백여의 지사, 호걸들이 모였다. 모두 한말(韓末)의 거물들이었다. “임정”은 중국, 만주, 소련, 미국 등에 산재한 우리 민족 전체를 통어하는 ‘정부’니만큼, ‘임시’라지만, 그 영역이 그리 좀스럽지 않았다. 여간한 수완과 정치력이 아니고서는 일치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본군벌의 만주점령과 북경침입, 그리고 대륙 침략이 있기 전에는 우리 임시정부도 당당했었다. 장개석 정부를 위시하여 국제적으로도 한국정부로서의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일본군벌이 대륙침략의 태풍을 타고 양자강 이남까지 휩쓴 때에는 어떠하였는가?

당황한 임시정부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동휘는 레닌의 군자금을 타 갔고 러시아로 갔다. 그 뒤를 이어 김립(金立)이 또 레닌에게 사정하여 운동비를 탔는데 그것도 새어 버렸다.

임시정부는 장개석을 따라 ‘중경’으로 피난했다.

일군의 공습은 치열하다. 소련을 끼고 공산통일이라도 해야 한다 하여 김원봉, 김두봉 등은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 해소를 극력 주장한다.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던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송병조, 차이석, 양기탁, 유동열, 7인 중에서 차이석과 송병조 2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5인은 ‘통일’이란 ‘말’에 취하여 임시정부에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이 일이 있기 하루 전에 5당을 통일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좌익정부 수립을 촉진할 수도 있겠고 적어도 ‘좌우합작’ 정도로는낙착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소앙이 5인조에서 탈퇴하고, 차이석과 송병조는 ‘임정’을 끝까지 지킨다고 태도를 표명했다.

결국 두 사람 밖에 남지 않은 국무위원으로서 ‘정부’ 구실을 할 수는 없게 됐다.

‘김구’는 당초부터 좌익이나 좌우합작에는 흥미가 없었다. “공산당은 말과 속셈과가 다르다. 공산당의 말을 누가 믿느냐?”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김구는 ‘임정’을 재건한다. 이시영, 조완구, 김봉준, 양소벽, 송병조, 차이석 등을 설득하여 ‘임정’ 재건에 합의를 보았다. 김구는 이분들을 대동하고 ‘가홍’으로 가서 그때 거기 있던 이동년, 안공근, 안경근, 엄항섭 등을 동참시켰다. 그들은 ‘남호’의 ‘놀잇배’ 한 척을 세내어 타고 호수 위, 배 안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국무위원 세 사람을 보선했다. 이동녕, 조완구, 김구가 당선됐다. 그래서 국무회의을 열었다. 그 후에 김구가 ‘임정’ 주석으로 추대되어 해방, 귀국의 마감막을 꾸몄다.

개인적으로 살핀다면 여운형은 친공으로 비켜서고 이광수는 친일로 일제품에 안기고 김립은 공금횡령으로 임정에 처형되고 이동휘는 해삼위로 달아났다.

정당 갈래도 그 ‘이력서’를 쓴다면 무던히 착잡하다.

다른 나라에 망명해 있는 신세에 정당이라고 하나쯤 있으면 됐지, 무슨 정당이 그리 많을까. 마감에 다섯 정당이 하나가 된 것까지는 좋으나 다 합했자 국무위원 다섯이 차지 않아서 겨우 두 사람을 낼 수 있었으니 비참하다고 할까. 자기 비위에 거슬리더라도 대의명분은 살려야 할 것인데, 결사대 군인의 창끝같이 상대방을 찌르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여유없는 민족심리가 우리의 전승이라면 김구 선생의 탄식도 영원하지 않을까.

댓글 1개:

  1.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박 4일동안 제주도에 갔다 왔습니다.
    그 동안 남북은 상당한 평화의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쉬운 일이었는데... 그 동안 너무 긴 시간을 제자리 걸음을 했던 것 같습니다.

    주변의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한반도의 분단을 이용했는데... 우리 남과 북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한반도의 분단을 이용했었다는 반성을 해 봅니다.

    통일과 평화를 위해서... 속좁게 사사껀껀 방해하지 말고... 큰 틀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나아가 더 큰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조금씩 양보해 나가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마치 자기들만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양... 게거품을 물고 '하나도 진척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있어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갖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적이 확실히 구분되어 있던 일제 강점기에서도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노선과 입장의 차이가 존재했고... 그것이 때로는 아쉬움의 기억으로 남기도 합니다.

    그것을 아쉽다고만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오늘날 전혀 다른 상황의 '난국'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단합된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허황된 꿈일까?

    나의 생각만... 내 집단(정당)의 생각만이 옳다는 생각은... 내 집단의 단합을 위해서는 바람직하지만... 큰 틀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토록 배워서 가방줄을 길~~~게 만들어 놓으신 정치인들은 왜 모르실까? 알면서 모른척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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