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4일 금요일

[범용기 제4권] (86) 野花園餘錄(其四) - 夢見先親(몽견선친)

[범용기 제4권] (86) 野花園餘錄(其四) - 夢見先親(몽견선친)

1981년 6월 29일 새벽의 꿈이다. 옛날부터 晝思夜夢(주사야몽)이라 하여 낮에 생각하던 것이 밤에 꿈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상식이 돼있다. ‘꿈’의 독립성이나 확실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알맹이’ 없는 ‘공론’을 ‘꿈 같은 얘기’라고 한다. “空想的(공상적)인 平和主義者(평화주의자)”나 “妄想的(망상적)인 군예찬론자”를 공격하는 요새 사람들의 악담(惡談)거리로도 인용된다. 현실주의자의 눈에 비친 이상론자도 같은 ‘단어’에 걸린다. 어쌨든, 꿈 얘기는 ‘실없는 얘기’와 동의어다. 그래서 ‘꿈’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서’에서 보면 ‘꿈’이 하나님의 계시로(路)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다. 아브라함의 얘기에도 나오지만, ‘아기 예수’의 ‘탄생설화’와 ‘도피’ 등등에서 “주의 사자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마태 2:13) 등등하는 구절이 여기저기 있다. 그런 ‘꿈’은 잊어지지 않는다. 잊을수 없는 꿈에는 뭔가 ‘예표’(豫表)가 품겨 있다고 봐야 할 것 가다. 서론이 길어져서 미안하다.

이제 6월 29일 새벽의 꿈을 계속 얘기하련다.

내가 자란 창꼴집 앞 시냇물이 불어서 어지간한 ‘강’ 같이 됐는데 저쪽 언덕에 선친께서 서 계셨다. 나는 큰 바위 밑이 물에 패여서 새파랗게 깊은 ‘물함정’ 같이 된 그 가장자리 얕은 여울을 돌맹이에서 돌맹이에로 조심조심 건너 뛰어 저쪽 언덕 선친 계신 고장에까지 갔다. 선친의 안색은 그리 ‘해피’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말씀하셨다.

“네가 보고싶어서 왔다. 이제 너를 봤으니 나는 간다!” 그리고서는 훨훨 옷자락을 날리면서 어디론가 가신다.

나는 급성간염으로 누워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이런 ‘꿈’이 내게는 예표적인 인상을 남긴다. 죽지는 않을 거란 예표라고 해두자.

비슷한 예표적인 인상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꿈이 아직도 둘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말기 서울에서 쫓겨 ‘도농’에서 지낼 때였다. 큰 소리치던 일본이 발악하며 몸부림치던 초기였다. 꿈에 나는 내가 산 1,500평 감자밭 가운데 호미놓고 서 있었다. 갑작스레 일본천황(소화)과 독일의 히틀러가 나 있는 고장에 오더니 나를 부둥켜안고 운다. “우리와 우리나라는 이제 어쩌란 말이요!” 하며 통곡한다. 나는 그들을 껴안고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일본도 독일도 그리 낙심하지 마시오…” 격려해 보냈다. ‘소화’는 나와 나이가 동갑이고, ‘히틀러’는 훨씬 아래다.

또 하나는 6ㆍ25 몇 달 전에 “꿈”이다. 나는 전농동 어느 언덕바지 높은 곳에 서 있었다. 서울시내를 바라봤다. 갑작스레 밀려든 싯벌건 진탕물이 서울을 흙탕물 호수로 만들었다. 남산 꼭대기가 약간 머리를 치밀었을 뿐이다. 그런데 얼마 서 있는 동안에 흙탕물은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개천, 논 도랑 할 것 없이 물이 흐를 수 있는 물고에는 어디서나 흙탕물이 곤두박질하며 빠져나간다. 길이 나타나고 논, 밭도 집도 물 속에서 얼굴들고 나온다. 나는 나타난 길을 걸어 서울에 들어간다. 목이 마른다. 간데마다 흙탕물고이니 ‘물’은 한량없이 많다. 그러나 마실 물은 없다. 더러운 ‘죽음’의 ‘시즙’(屍汁)이다. 마실 수 있는 ‘물’은 역시 남산 약수터 바위 틈에서 한방울씩 졸졸 흘러내리는 맑고 단 약수다. 그것이 ‘생명샘’이다. 나는 6ㆍ25 동란이 끝난 오랜 후일에사 이것이 ‘이북남침’에 대한 ‘예표’였구나 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기독교를 비겨보며 뭔가 ‘사명’ 같은 걸 느끼기도 했다.

또 하나는 6ㆍ25 동란 직후 일이다. 교수사택들 짓기 전에 나는 학교 구내에 헐리다 남은 오막살이 초가집에 먼저 와 있었다. 수십년 전부터 고질인 ‘이질’이 심해져서 ‘배’가 걸레짜듯 뒤틀린다. 난도질 하는 것 같다. 그 도수가 점점 잦아진다.

하루는, 역시 ‘비전’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집 앞 행길복판에 거지상여 같은 사람 키 절반만큼 높이의 단가(担架)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내가 누워있었다. 그런데 어떤 여인이 내 옆을 지나 골짜기 절로 간다. 그의 낯은 아주 무표정이고, 시체같이 검푸르다. 그는 내 얼굴에 지극히 의례적인 ‘키스’를 하고서는 나를 떠나 제갈데로 갔다. 나는 “아, 저것이 죽음의 여신이구나!” 하고 직감했다. “죽음의 여신이 ‘작별키스’하고 갔으니 나는 그의 포로가 아니다. 그의 길동무도 아니다” 하고 혼자 생각했다. 그것도 잊지 못할 ‘예표’로서의 꿈이었다.

[1981.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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