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2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72)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발코니의 단상

[범용기 제4권] (72)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발코니의 단상

오늘은 ‘발코니’가 나에게 허락된 유일 가능한 외출 산책장이다. 초여름 햇살이 쨍쨍하다. 길다랗게 허리펴고 늘어진 ‘등의자’가 고독한 볕쪼임에 지친성 싶었다. 나는 그 뒤에 헌 담요를 펴도 머리쪽에는 베개를 받히고 의자 기장대로 길게 눕는다. 이 등의자는 무던히 ‘고물’이어서 엮은 줄이 가운데쯤에서 두동강이 났다. 그러나 그 구조자체가 둘로 끊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두 다리로 그 동강날뻔한 불연속성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오늘도 날씨는 청명 그것이다. 하늘은 무한정 푸르다. 햇살이 따끔 따갑다. 억억만리 공간을 날아와 내 야윈 피부 속에 파고든다. 나는 푸른 숲으로 덮힌 푸름의 해안성을 본다. 이것은 우주생명의 바닷가다.

이 ‘발코니’는 우주의 수평선을 바라보는 ‘원두막’이다.

검정새는 오늘도 나타난다. 내가 누운 ‘발코니’를 둘러 막은 낮은 난간 대각선 귀퉁이 난간에 앉는다. 그것이 자기의 예정석인 것 같다. 내 자리에서 1미터 정도의 거리다. 그는 노란 ‘부리’를 갖고 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를 본다. 그러다가도 내가 움직이면 곧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나는 친하고 싶은데 그는 나를 믿지 않는다. 믿지 않으면 ‘친구’가 못된다.

‘앗시시’ 성 프랜시스의 사랑에는 이리떼도 통했단다. 이리들이 마을에 해를 끼친 때, 그는 그 마을 사람들로부터 이리 먹을 식량을 거두어 한 고장에 놓고 “형제 이리들아 여기 와서 먹고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아라”했다. 이리들은 길들인 개처럼 무릎꿇고 절했다는 것이다.

그가 나타나면은 온갖 새들이 그의 앞에 모여와 그의 ‘설교’를 듣는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매 새들이여, 하느님을 찬양하라”한다. 다같이 제나름대로의 노래를 부르며 날개를 친다. - 이런 얘기는 ‘전설’에 속한다고 하겠지만 전 우주 만물과 인간과의 “사랑의 공동체”는 신비하면서도 당연하다.

전 우주의 생명이 내 안에 감싸여 있고 내가 전 우주 생명에 일체가 되어 있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범신론’이 아니다. ‘사랑의 공동체의식’인 것이다.

나는 발코니 가장자리에 날마다 나타나는 검정새 한 마리와도 친하지 못한다. 내가 움직이면 그는 간다. 접근도 못하게 한다. ‘성프란시스’와 나는 같은 그리스도 사랑 안에 있으면서도 거룩한 사랑의 수용도(受容度)에 있어서는 거의 이질적이다. 모이를 갖다 줘도 먹지 않는다. 물을 떠다 줘도 마시지 않는다. 나는 슬퍼질 정도로 “이방인”인 것이다. ‘사랑’, 그것은 함부로 쓸 수 없는 두려운 단어다. 부모자식 사랑 속에도 새파란 원한이 Abyss처럼 무섭게 침전되 있는 것 같다. 누구를 원망하랴! 나 자신이 슬픈 것 뿐이다.

[1981. 6. 15]

댓글 1개:

  1. 발코니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가장자리에 날아온 새 한마리를 바라보며 김재준 목사님은 동물들과 교감하고 친하게 지냈던 성 프란시스를 떠올리셨다.

    나는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새는 내가 움직이면 경계심을 품고 날아가버린다.
    "나는 친하고 싶은데 그는 나를 믿지 않는다. 믿지 않으면 '친구'가 못된다."

    이것은 동물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면 그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

    오늘날처럼 각박한 세상 속에서 진정한 친구를 만나고 사귀는 것이 얼마나 힘들어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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