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0일 월요일

[범용기 제4권] (61) 細語錄(세어록) - 소리와 말

[범용기 제4권] (61) 細語錄(세어록) - 소리와 말

그게 1972년 쯤이었던가? 기억이 희미하다. 나는 워싱톤에 들려 그 당시 “미국의 소리” 한국분과 방송책임을 맡은 황재경을 찾았다. 그가 내게 무슨 “멧시지” 비슷한 걸 방송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때만해도 나는 그와 허물없이 지내던 터이기에 나는 불쑥 말했다.

“황목사는 이제 나이도 ‘불혹’(不惑)에서 ‘지천명’(知天命)에로 들어갈 계제고, 타고난 재사이기도 한데 ‘미국의 소리’를 듣노라면 이랬다 저랬다 하니 거 왜 그러시우?”

그는 껄껄 웃는다.

“내가 맡는 직무는 ‘미국의 소리’지 내 말이 아니잖소?”

그건 ‘소리’지 ‘말’이 아니라는 것, 소리라도 내 소리가 아니라 ‘미국’의 소리라는 것이다. “그 자들이 ‘내가’ ‘내말’을 하라고 여기 앉히고 월급 주는줄 아시오?”

들어보니 그럴 듯 했다. 궤변 같기도 하지만 진담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진실한’ ‘말’이 필요하다. 기계적인 소리는 그 정도로 족하다.

카톨릭 소장 신학자 ‘한스 큉’은 그의 ‘교회의 구조’라는 저서에서 “역사가 하나님 뜻을 역행할 때, 교회가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그 교회의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단언했다. 특히 한국과 같은 정황에서 교회가 잠잠할 수가 없다. 그런데 너무 말이 없다고 실망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메아리 없이 사라지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 하더라도 예언자에게 침묵만이 있을 수는 없겠다.

그러나 ‘소리’ 없는 것이 곧 ‘말’ 없는 것이랄 수는 없다. 소리 없는 말이 소리 없이 넘쳐 퍼진다.

‘공자’도 “하늘이 어찌 말하리오. 그러나 사시(四時 - 봄, 여름, 가을, 겨울)가 행하고 만물이 화옥한다”고 했다. 시편 19편 기자는 “방언도 없고 말씀도 없으니 그 소리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소리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 땅 끝까지 이른다. …” 했다. 소리 없는 말이 땅끝까지 들린다는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예수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말없는 말이 더 두려운 말이었다.

한국의 예언자가 말이 없다고 너무 실망할 것은 없다.

그들의 말이 일시 ‘카타콤’에 숨은 것 뿐이다. 퍼지는 말이 로마를 뒤집었다.

한국의 예언자들은 ‘몸’으로 말한다. 그 몸을 건드리면 그 말이 더 커진다. ‘몸’이 ‘말’이기에 말이 몸으로 움직인다.

우리는 침묵의 예수를 생각한다. 할 말을 다했기에 몸으로 말씀을 대신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몸을 죽였다. 무덤에 넣고 인봉했다. 역시 ‘침묵’이었다. 그러나 셋째 날에 그 몸이 ‘영의 몸’으로 나타났다. 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몸이어서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살아서 비참한 인간들을 방문한다.

나는 한국에 그리스도가 방문오셨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고 계심을 안다. 대제사장, 바리새인, 빌라도는 언제 어디에나 있다. 한국에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리스도가 일러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이는 복이 있겠다.

[1976.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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