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4일 화요일

[범용기 제4권] (38) 내 백성 내 민족 – Soil

[범용기 제4권] (38) 내 백성 내 민족 – Soil

“Soil”이라면 토양(土壤), 즉 “흙”인데 이 흙이 나라로서는 “국토”가 되고, 개인으로서는 자기 “밭”이나 “집터”, “마당”(뜨락)이 되고, 나무와 푸에게는 뿌리 내릴 “어머니” 젖가슴이 된다. 도대체 우리 자유한다는 “동물”들도 “우주인”처럼 바닥에 발 붙일데가 없다면 어떻게 걸을 수 있겠나! 그래서 나라의 “국토” 어느 한 모새기 단 몇 평이라도, 어느 작디작은 무인도 하나라도, 어느 다른 나라에 점령된다면 몇 만 명 국민의 목숨이 오가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 “흙”은 “단순한 ‘자연’의 흙”일 뿐 아니라, 이미 인간화, 국민화한 흙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몇천년전부터 조상들이 살았고, 그 삶의 터전을 지키노라고 침략자들과 싸웠고 대대손손 물려주고 물려받으며 애지중지 간직해 온 유산이기 때문이다. 한 덩어리 바위, 한 그루 나무 한 포기 꽃이라도 우리 겨레의 손때묻고, 정과 한이 감싸인 흙이요, 산이요, 바위요, 시내요, 나무요, 풀인 것이다. “국토”는 이제 내 “몸”의 한 부분이요, 내 “몸”의 외연(外延)이다. 국토를 잃으면 “애기”나 잃은 듯 가슴 아프다. 한ㆍ일 합방 때,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자결”했던가는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혈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짐작이 갈 것이다.

필자는 지금부터 약 40년 전 “하와이”에 처음 들렀을 때, 거기 친구들이 저녁후에 아름드리 큰 나무 밑에로 나를 데려갔다. 거기서 하와이 원주민들의 “훌러땐스”를 구경했다. 땐스 자체도 특이했지만 “일루미네이션”으로 휘황 찬란한 한 그루 거목이 내게는 더 흥미로웠다. 그 나무는 가지가 내리 드리워 그 끝이 땅에 닿자마자 뿌리를 박아 또 하나 딴 그루의 나무가 된다. 그것이 줄래줄래 숲을 이룬다. 진짜 한 숲이 한 나무다. “피”가 한 “핏줄”을 돈다.

오랜 후일에 듣기로는 그 종류의 나무가 여기저기 있어서 시가 계획을 다시펼 때, 그 나무를 파내 버리자고 시에서 손대려 했다가 시민들의 항거로 길을 돌려 냈다 한다. 그래서 길 가생이에서 그 나무는 여전하다고 했다. 나도 흐뭇했다. 몇 백 년, 몇 천 년, 이 겨레를 지켜보며 뿌리를 지심(地心)까지 내린, 그리고 그 뿌리가 20리 30리의 넓이에 뻗은 경기도 양주(揚州)의 은행나무를 어느 누가 감히 톱질할 수 있을거냐? 속칭 원효대사가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다. 어느 작고 가는 가지 끝 하나 마르거나 시들은데가 없다. 그런 나무는 진정 국토의 “수호목”이다. 성균관 대성전 뜨락에도 그런 거목 느티나무들이 아직껏 싱싱하다. 연령으로는 “이조”(李朝)와 비슷하겠지만, 목숨은 “이조”를 한토막 “과거”에 묻고 미래를 자기 몸에 잉태하며 끝없이 산다. 흙의 자랑이고 시냇물의 자랑이고 민족생명의 자랑이다.

“퍼얼ㆍ벅”의 노벨상 대표작인 “대지”(大池)에 그 주인공(농민)이 기아선상(飢餓線上)에서 가족을 흩고 유랑하면서도 자기 밭에서 쥐고 간 “흙” 한 줌이 그의 “혼”을 “투사”같이 싸울 수 있게 했다는 얘기가 있다. 결국 그는 자기 흙, 뿌리내릴 자기 Soil을 되찾고야 말았다. 인상적이다.

[198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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