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3일 월요일

[범용기 제4권] (35) 主人(주인)과 主役(주역) - 모두가 만나는 그 날

[범용기 제4권] (35) 主人(주인)과 主役(주역) - 모두가 만나는 그 날


종말에 예수를 만나는 그날,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 만나 즐긴다는 성경귀절이 있다. “부활한 몸”, “영의 몸”으로 다시 나타나는 성도들, 그들은 땅에서는 죽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산” 사람이다.

그때, 땅에서 같은 “증인”이면서 죽지 않고 남아 있는 성도들도 있다. 이들도 “들려올라, 공중 또는 새 하늘, 새 땅에서 두 겨레가 함께 만나 즐긴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옳으심을 먼저 구하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고난으로 죽는다. 그러나 “뜻”으로는 “산”사람이다. 해외에서 같은 증인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보장된 자유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그러나 “뜻”으로는 죽은 것일 수도 있겠다. 적어도 국내 수난자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살았으나 죽었다”, “죽었으나 살았다” 이런 역설이 갈라져 갈라진 그대로 맴돈다면 함께 만나 즐길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주여 오시옵소서”에 미해결의 소망을 기원한다(묵시록 22:20).

그리스도가 역사 안에 다시 오셔야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될 “만남”이 온다고 예언한다.

천년왕국 후에 “무저갱”에서 해방된 악마가 천하를 휩쓴다. 악마는 “아마겟돈”의 최후결전을 시도한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쏟아져 그들은 멸망한다. 그리고 “불과 유황의 바다”에 던져진다. 영원한 고통이 그들의 운명이 된다. 죽는 축복도 없다는 말이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신 “새 하늘”, “새 땅”이 오기 전에 있어야 할 “청소작업”이랄까?

우리가 이런 상징문학의 감추인 “뜻”을 다 알아낼 재간은 없다.

그러나 한국의 사태에서도 어렴풋이 이 비슷한 묵시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홍해를 통과해야 한다. 그 동안에 살지 죽을지 혹은 살았다면서 죽은 것인지, 죽었기에 산 것인지, 자기로서도 판단이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주님 오실 때에는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 만나 주님 사랑 안에서 같이 즐긴다는 약속만은 믿고 싶다.

환란이 속히 끝나고 만남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주여 언제까지니이까?”(시편 79:5, 82:3, 89:46))

[1977.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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