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3일 월요일

[범용기 제4권] (28) 主人(주인)과 主役(주역) - 목사의 심정 (2)

[범용기 제4권] (28) 主人(주인)과 主役(주역) - 목사의 심정 (2)


목사란 어떤 경우에는 “제한선 돌파”란 “파격”이, “상식”과 “직업도덕”과 “일반예론”을 웃어버리는 뱃장이 필요하다. 무슨 “영웅”이나 “전문가”, “목회기술자”, 사회의 VIP로서의 오만이나 “긍지”를 과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사실, 목사에게서 이런 Pride를 빼면 남는게 뭐냐? 밤낮 “종”살이만 하란 말이냐? 허기야, 밤낮 “종”의식으로 섬긴다면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 형(型)이니만큼 하느님의 축복된 Pride가 주어질 것이고 교인과 사회인의 존경도 자연스레 흘러들 것이다. 그런 경우에 목사의 Pride는 “천작”(天爵)이고 또 “인작”(人爵)일게다.

빅톨ㆍ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감독(Bishop)의 얘기가 생각난다. 자기나라에 사막의 메뚜기떼처럼 덤벼들어 마구 약탈하던 야만족이 관군에게 토벌되어 패잔병 신세가 됐다. 그래서 우왕좌왕(右往左往)하다가 목마르고 배고파 교회당엘 찾아온다. 감독에게는 그를 살릴 자금이 없다. 그는 성당 제단에서 성례 때 쓰는 금잔, 금쟁반, 금접시, 금병 등등을 몽땅 자루에 넣어 짊어지고 귀금속점에 팔아 그 돈으로 먹을 것, 입을 것들을 싣고 와서 나누어 주었다.

“인간의 목숨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는데, ‘성당’이 무어며 제단의 성례 그릇이 다 뭐냐?” 했다.

6ㆍ25때, 이북 패잔병을 우리는 눈으로 봤다. 나는 그때, 전농동에 살았다. 어떤 애기병정 – 아마 14, 5세 됐겠지! - 이 혼자 도망치는데 “군복” 그대로는 잡히는대로 이쪽 저쪽에서 모두 죽일테니 한복 한 벌 입어야 했다. 옥양목 고의적삼을 누군가 입혀줬다. 무장없는 애기병정은 진짜 어느 촌 “애기머슴” 꼴이었다. 병정에게는 총, 칼이 “위신”(威信)이다. 그 인간 자신이 아니라, 그에게 입혀진 군복과 무기란 말이다. 그러나 그 “위신”을 벗어버리고 고이적삼을 입혀 “위장” 시켜 살리는 것이 목사의 심정이겠다.

가령, 6ㆍ25때, 어떤 공산당 패잔병이 뒤따르는 국군에게 쫓겨 목사집에 들어와 “제발 숨겨줍쇼!” 했다면 목사가 그걸 거절했어야 할까? “이 빨갱이야! 나가라” 할 것인가? 그렇잖으면 숨겨 놓고서 국군에게 고발할 것인가? 그가 “목사”의 마음이라면 숨기고 빼돌리고 하면서 끝까지 그 목숨 살리려고 애태웠을 것이다. 국군에게 들켜서 “적을 숨겨준 죄”로 잡혀가도 목사에게는 오히려 차원 높은 긍지가 영광스레 남을 것이다. 우리는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을 생각한다. 가택수색 때, “적”의 “스파이”를 천정에 숨겨놓고서 “잠깐 들렸다가 어디론지 나갔다…”고 거짓말로 그의 목숨을 살렸다. 성경은 그를 정죄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윗” 왕통의 “근조”(近祖)로 특기했다. 목사의 도량이 “라합”보다 좁아서야 쓰겠나!

[1981.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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