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8일 금요일

[범용기 제4권] (108) 역사물 단장 – 8.15 해방과 좌익

[범용기 제4권] (108) 역사물 단장 – 8.15 해방과 좌익

- 건준 -

김일성은 8ㆍ15 해방 때까지도 안도현에 숨어 ‘게릴라’ 강화에 주력했다고 한다.

8ㆍ15 해방의 주역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이북이나 이남을 막론하고 우리 민족의 참여는 도외시되거나 ‘주변적’인 것이었다.

어쨌든, 패전 일본은 정권은 송진우에게 인수시키려고 교섭했으나 송진우는 연합군 진주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입국까지는 행정권 인수를 유예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교섭했다. 여운형은 아래와 같은 조건부로 인수를 승낙했다.

(1) 전국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2) 8~10월까지의 3개월 식량을 확보하라.(3) 치안유지와 건국운동에 대하여 절대 간섭하지 말라.(4) 학생과 청년을 조직훈련하는 일에 절대 간섭하지 말라.(5) 노동자 농민을 건국사업에 조직동원하는 것을 절대 간섭하지 말라.

이제 아무 권한도 없이 창황하게 쫓겨나는 일본총독부에 이런 따위 요구 조항을 제출하여 동의를 구한다는 그 자체가 쑥스럽다. “너희는 죽지 않으려거든 하루 속히 도망칠 궁리나 해라! 그렇잖으면 민중의 보복으로 섬멸된대도 우리 책임은 아니다. 너희 정부 책임일 것 뿐이다.” 해뒀더라면 통쾌할 뻔했다.

어쨌든 건준은 1944년 8월 10일에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결사대인 ‘건국동맹’을 모체로 하고, 장안파 공산주의자인 이영, 최익한, 강진 등과 안재홍 주변에 모인 진보파 민족주의자들을 결속하여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조직했다.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 총무부장에 최근우, 조직부장에 정백 등이 선임됐다.

1945년 8월 28일에 선언서를 발표했다. 그 요지는 이 모임은 국가 건설준비기관으로 과도기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면서 신정권확립을 위한 산파역을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이 ‘건준’ 창립초기부터 박헌영을 중심한 ‘코뮤니스트그룹’(‘콩구루’라고 약칭)은 교묘하게 ‘건준’에 침두하여 암약했다. 그래서 일부지방을 제외하고는 ‘건준’은 전적으로 ‘사회주의정당’이라는 인상을 남기게 됐다. 교조주의 사회주의나 극좌 친소파는 아니었으나 ‘건준’은 그들에게 말려들었달 수 있겠다. 부위원장은 허헌이었다. ‘콩구루’는 ‘미제’를 비난하면서 인민대중을 미군 총구멍 앞에 몰아넣는 극좌로 달렸다. 안재홍은 건준에서 탈퇴했다.

1950년 7월 20일에 발표한 “한국이 위기에 대처하는 미국의 정책”이라는 ‘한국백서’에 의하면 미군의 최전선지역은 ‘오끼나와’라고 했다. 그런데 소련군은 8ㆍ13에 벌써 북조선의 옹기를 점령하고, 1945년 8월 8일에 옹기항을 점령, 19일에 평양을, 22일에 개성, 해주, 원산 등지를 25일에 함흥을 점령했다. 이 사실을 보아 맥아더사령부의 38도선에 대한 사전밀약을 계산에 넣지 않을 수 없다. 말없이 수수방관했기 때문이다.

댓글 1개:

  1. 해방 직후의 역사 속에서 여운형의 '건준'은 상당히 다양한 해석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건준'을 조직하고... 정상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이... 누군가의 이간질과 테러로 인해서 좌절을 겪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장공은 건준이 좌익의 침투에 의해서 초기의 모습이 변질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건준의 가치를 평균 이하로 깎아먹으려는 후세의 의도적인 해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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