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8일 금요일

[범용기 제4권] (107) 역사물 단장 – 3.1 독립선언과 그 후

[범용기 제4권] (107) 역사물 단장 – 3.1 독립선언과 그 후

1919년 3월 1일 – 손병희 등 33인이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전국에 반일데모가 전개되었다. 일제무장군경에 살해된 동포 7,509인, 부상자 15,961명, 검거된 자 46,948명이다. 파괴된 건물은 교회당 47, 학교 2, 민가 715였다. 3ㆍ1에서 5월말까지 각지에서 벌어진 ‘데모’ 1,542회, 참가자 223만이다. 총독부 집계와 민간수집재료가 그 수에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비슷하다. 참가자 수 같은 것을 정확하게 집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필자 주)

1919년 3월 – 현순, 여우현, 김혁 등이 상해에 조선독립 임시사무소를 설치했다.

1919년 4월 – 현순 등 28지사가 조선망명 정부 발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했다. 의장 이동녕, 부의장 손정도, 임시헌장, 10조 의결, 국호는 대한민국, 국무위원 선출결과 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이동휘 등등이었다.

1919년 4월 – 이동휘는 만주 유하현에 3ㆍ1운동 이후 만주에 온 청년들을 규합 ‘대한독립단’을 결성했다.

1919년 5월 – 이동휘가 설립한 ‘신흥강습소’를 신흥군관학교로 개칭했다.

1919년 6월 – 오현주, 이정숙, 오현관 등이 조직한 ‘혈성위원국부인회’와 최숙자, 김희렬, 백성현 등이 조직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합하여 ‘대한국민애국부인회’가 되고 회장에 박마리아, 부회장에 이혜경을 선출했다.

1919년 8월 –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추대된 이승만이 대통령 칭호를 요구하고 취임을 거부했기 때문에 군무총장 이동휘가 총리로 됐다.

1919년 9월 – 강우규가 제등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다.

1919년 10월 – 만주에 대한정의군정사(政司), 대한청년단연합회, 광복군총영, 북간도국민회소속독립군 등의 ‘독립군’이 창설됐다.

1919년 11월 –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하고 항일투쟁 직접행동의 선봉에 섰다.

1920년 12월 – 만주에서 김좌진이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 9백명을 선멸했다.

1920년 12월 – 이동휘 주동으로 만주의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군무도감부, 광복단 등이 통합되어 간도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됐다.

1921년 1월 – 이루구꾸에 본부를 옮겨 고려 혁명군으로 조직을 확대했다.

이 ‘고려혁명군’은 후에 볼세비키군과 충돌하여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것이 소위 ‘흑룡강사건’이다.

1921년 12월부터 일본군은 간도의 조선인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그때 웅상의 송창근 종형 송창회도 일가족과 함께 학살됐다.

1922년 3월 – 독립군 행동부대가 상해부두에서 일본육군대장 다나까(田中義一)에게 폭탄을 던졌다.

1922년 8월 – 만주의 서로군정서, 한족회, 대한독립단, 광복군총영, 만주광복군사령부, 광한희, 대한국민단 등 여덟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통의부(통군관)를 조직했다.

1922년 9월 – 관동대지진 때, 일본정부는 동경재류 조선인 6천명을 이유없이 학살했다.

1923년 1월 – 김상옥이 경성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1925년 5월 – 총독부는 치안유지법을 제정 실시했다. 다수가 검거됐다.

1925년 6월 – 총독부 경무국장 三天富松과 만주 동삼성 정권수반 장작림이 ‘삼시협정’을 맺고 조선인독립운동단체를 공동으로 탄압하게 했다.

1926년 1월 20일 – 백만수, 신석우, 안재홍, 이상재, 권동진, 홍명희 등 말하자면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계열이 총망라되어 34명이 ‘신간회’를 조직했다. 지회 백수십개소, 회원 삼만이었다.

1927년 5월 – 앵구부인회와 중앙여자청년회가 통합하여 근우회(槿友會)로 발족했다. 정칠봉, 우봉운, 박호진, 허정숙 등이 활약했으며 지회 30개소였다.

1927년 – 만주 길림에서 조선독립운동자 전면 대검거가 있었다.

1928년 3월 –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했다.

1929년 11월 3일 – 신간회 관련하에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 전국적인 반일운동이 전개됐다.

1930년 –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자 18,811명을 검거했다.

1931년 9월 –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했다.

1932년 3월 – 일본군이 상해를 침범했다.

1932년 3월 – 일본군이 만주국을 건국했다.

1932년 5월 – 임시정부를 절강성 항주(杭州)에 옮겼다.

1932년 –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에 파견했다.

1941년 12월 8일 –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1942년 4월 – 중국 국민정부는 중경에 옮겼다. 같이 옮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식 승인했다.

1942년 7월 –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은 중국군 지휘하에 들었다.

1942년 10월 – 독립운동세력의 좌우 두파가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양파연합내각으로 개편했다. 좌파는 조선민족의용대를 광복군 ‘지대’로 하여 임정에 편입시켰다. 의정원은 의장에 홍진, 부의장에 최동오, 내각은 주석에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군무총장 김원봉, 중국군지휘하에 편입된 광복군은 부사령관에 김원봉, 참모장이 김홍일이었다.

1942년 11월 – 일본정부는 조선인에게도 징병제도를 실시했다. 그래서 조선학도병을 전쟁일선에 강제 출전시켰다.

1942년 10월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 이희승 등 수십명이 투옥됐다. 동시에 국내 흥사단원들도 투옥됐다. 국내에서는 ‘수양동우회’란 이름을 갖고 있었고 그 주동인물은 이광수, 주요한, 백영렵, 김병연 등등이었다.

부기 : 조선인 망명정권은 셋이 있었다.

(1) 1919년 3월 17일 연해주에서 결성된 국민회의, (2)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3)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결성된 국민대회이었다. 장래 국내인민 대표로서 의정원을 구성한다는 조건으로 상해임시정부를 법통적 망명정권으로 한다는데 합의했다.

연해주 국민회의는 이동휘 주동으로, 상해임시정부보다 먼저 조직된 망명정부였으므로 상해임시정부와의 합류를 반대하는 요인들이 많았었으나 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의 기능적 우위(優位)를 역설하여 상해임시정부에의 합류가 승인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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