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1일 화요일

[설교문] "그리스도와 교회"[에베소서 1장 17-23절] - 1957년

그리스도와 교회[에베소서 1장 17-23절]

 한국신학대학교수 김재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였다.

四肢百體(사지백체)가 다 가추어 있어도 머리가 없으면 몸 노릇을 할 수가 없다. 머리는 몸에 정신과 목적을 부여하며 온갖 주권적인 지도명령을 내린다. 몸은 머리에 의하여 온전함을 이루며 그 의미를 찾는 것이다. 머리도 몸이 없이는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 할 때 교회 없이는 그리스도도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느냐? 그리스ㅗ는 그리스도 自身(자신)으로서 온전한 존재시지만, 그가 교회를 향한 사랑이 너무나 지극하시기 때문에 그는 교회없이 온전함을 느끼지 못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시 또 그리스도와 교회를 남편과 아내의 사이로 비유하였다. 남편이 아내를 제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그 사랑안에서 순복하는 것은 남편이나 아내가 各其(각기) 스스로의 존재로서 결함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 서로 사랑하는 것 때문에 相對方(상대방)이 없이는 온전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편이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 같이 그리스도와 교회도 그렇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根本態(근본태)를 본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회에 개체와 단체의 관계를 좀더 고찰하고 다음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30歲(세)까지 노동자로 지내다가 요한에게 세례받고 두루다니며 선한 일을 하시다가 十字架(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三日(삼일)만에 부활하시고 40日(일)만에 승천하신 분으로서 그의 記錄(기록)은 어디까지나 뚜렷한 個人(개인)이요 다른 아무와도 混同(혼동)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란 것은 累千年來(누천년래) 몇 億萬萬(억만만)의 사람들이 그 會員(회원)이 되어 오고 가고 나고 죽고하면서 유지되어 오는 한 宗敎集團(종교집단)이어서 그리스도라도 ‘個人’(개인)에게 ‘몸’이라는 말로 一致(일치)시키기에는 너무나 散漫(산만)하다. 그리고 그 歷史的(역사적)으로 저질러 온 사건들과 그 性格等(성격등)으로 볼지라도 ‘그리스도’ 個人(개인)의 하신 일과 그 品格(품격)에 一致(일치)시키기에는 너무나 犯罪的(범죄적)이다. 이것을 有機體的(유기체적)인 生命(생명)으로 비유해서 소위 ‘神祕體’(신비체, Mystical Body)라고 하여 보지만 그것은 說明(설명)하기에는 너무 神祕(신비)하다.

여기서 舊約思想(구약사상)에 있는 이른바 (Corporate Personality), 法人格(법인격) 또는 共同人格(공동인격)이란 것을 聯想(연상)하는 것이 理解(이해)에 도움이 될 줄 믿는다. 舊約(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등을 부르셔서 그들 하나 하나와 ‘너’, ‘나’의 관계를 세우셨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個人的(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舊約(구약)에서의 이런 個人(개인)들은 모래알처럼 分散(분산)된 個體(개체)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共同人格(공동인격)으로, 하나님과 계약관계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個人(개인)이 아니라 全民族(전민족)이다. 이 全民族(전민족)이 한 個人(개인)과 같은 單位(단위)로 하나님 앞에 계약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個人(개인)임과 同時(동시)에 이스라엘 全體(전체)였고 이스라엘 全體(전체)는 한 民族(민족)임과 동시에 個人格(개인격)이었다.

이사야 53章(장)은 그것이 한 個人(개인)으로서의 메시아가 受難(수난)의 종으로 예언된 것임과 동시에 또한 이스라엘 民族(민족), 특히 남은 백성으로서의 새 이스라엘의 受難(수난)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民族(민족)의 歷史(역사)는 그리스도를 指向(지향)하고 하나님께서 親(친)히 進行(진행)시킨 歷史(역사)니만치 하나님의 獨生子(독생자) 그리스도가 오신다면 當然(당연)히 이스라엘 民族(민족)의 共同人格(공동인격)의 焦點(초점)에서 불붙는 ‘人子’(인자)에게 聖靈(성령)의 成肉(성육)으로 臨(임)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全(전)이스라엘 民族生命(민족생명)의 個人化(개인화)한 것이어서 그의 안에는 이스라엘 民族(민족)의 全歷史(전역사)가 품겨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다윗의 子孫(자손)’이었으며 ‘인자’(人子)였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個人(개인)이면서도 全(전)이스라엘 民族(민족)으로서의 法人格(법인격)을 가진 個人(개인)이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도 이런 線(선)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個人(개인)이지만 그의 生命(생명)이 움직여 이루어진 集團(집단)으로서의 敎會(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法人格(법인격)이어서 결국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로 表識(표식)할 수 있는 것이다. 敎會(교회)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子孫(자손)이며 이스라엘의 傳統(전통)을 이어가진 共同人格(공동인격)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말하기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王(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所有(소유)된 백성이니라”(베드로전서 2:9, 10)한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옛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신 것 같이 교회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옛날 이스라엘 나라가 世界萬邦(세계만방)의 祭司長(제사장) 國家(국가)로, 萬民(만민)의 仲保者(중보자)가 되었던 것 같이 敎會(교회)도 永遠(영원)한 大祭司長(대제사장) 그리스도를 통하여 萬民(만민)의 仲保機關(중보기관)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禮拜時(예배시)마다 仲保(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이 까닭이며, 韓國敎會(한국교회)는 적어도 韓國(한국)의 제사장으로 韓國(한국)을 위하여 하나님께 禱告(도고)하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이 世界列邦中(세계열방중)에서 聖別(성별)되어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新政國家(신정국가)로 되었던 것 같이 敎會(교회)도 하나님이 直接(직접) 다스리는 領域(영역), 그리스도의 직접 통치하시는 區域(구역)으로 된 “거룩한 나라”이며,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所有(소유)된 백성, 즉 하나님께서 ‘이것은 내 백성이다’하고 갈라세우신 백성이었던 것 같이 敎會(교회)도 하나님이 그 아드님의 피로 사신 백성인 것이다. 묵시록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라”한 것은 이런 교회의 究極(구극)을 말한 것이다.

교회의 基本態(기본태)가 이런 것이니만치 이런 교회가 地上(지상)에서 활동하는 活動態(활동태)도 이에 準(준)하여 理解(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1) 교회 자신의 생활 –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어 있느니만치 그 생홀은 그리스도의 생활態(태)에 따를 것이다. 그리스도의 生活(생활)은 한 마디로 말 한다면 ‘十字架(십자가)의 생활’이었다. 人間(인간)을 向(향)한 하나님의 命令(명령), 하나님을 向(향)한 人間(인간)의 生活(생활)은 교회 안에서 그 모본을 세운다. 하나님의 命令(명령)은 逆說的(역설적)이다. 自然(자연)히 타고난 生活(생활)의 斷切(단절)없는 發展(발전)이라는, 世上(세상)에서의 一般生活樣式(일반생활양식)을 따른다면 교회는 살지 못한다. 一般(일반) 人間(인간)도 살지 못한다. “네 목숨을 얻고저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잃으면 얻으리라”, “나를 위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모든 악하다하는 거짓말로 비방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로 즐거워하라” 하신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獨子(독자) 이삭을 죽음의 祭壇(제단)에 바치기 전에는 그 信仰(신앙)의 完熟(완숙)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교회도 언제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위하여 죽는 것을 택하는 때에만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 敎會員(교회원)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肢體(지체)된 자들은 재산이건, 지식이건, 時間(시간)이건, 技術(기술)이건, 무엇보다도 우리 各其(각기)의 存在自體(존재자체)를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죽이는 때, 그 안에서 참으로 사는 길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一般(일반) 生活(생활)에도 適用(적용)되는 참 사는 唯一(유일)한 것이다. 十字架(십자가)가 골고다 언억 위에 서므로 萬民(만민)에게 永生(영생)의 길이 열렸다. 十字架(십자가)는 그러므로 지금도 교회의 서는 자리며 그 “포인트”다.

(2) 교회는 그 서야할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向(향)하여 무엇을 하는가? 舊約時代(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代言(대언)하는 豫言者(예언자)가 있었던 것과 같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福音(복음)을 代言(대언)하는 예언자로서, 그 講壇(구단)을 가지고 있다. 또 모든 信徒(신도)는 다 이 일을 맡은 豫言者(예언자)들이다. 舊約時代(구약시대)에 제사장이 있어 仲保(중보)의 직분을 한 것 같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萬民(만민)을 위하여 代禱(대도)하며 聖徒(성도)의 제물을 聖別(성별)하여 제단에 바치며 하나님의 赦宥(사유)와 祝福(축복)을 傳達(전달)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제사장職(직)에 치중하고 改革敎(개혁교)에서는 豫言者職(예언자직)에 치중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그리스도가 예언자와 제사장직을 完成(완성)하신 것 같이 교회도 이 두 직분을 다 맡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왕’(王)으로 임하실 때 교회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왕노릇’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十字架的(십자가적)인 奉仕生活(봉사생활)이 그 바탕을 이룬 때에만 주어질 수 있는 特權(특권)이요, 오늘의 强力主義的幻想(강력주의적환상)은 아닌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人間(인간)에게 전해지고 人間(인간)의 하소연이 하나님께 上達(상달)되어 하염없는 罪人(죄인)들이 永遠者(영원자)와 交際(교제)하는 곳이 교회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늘에 닿는 ‘사다리’다. 이것이 교회의 活動態(활동태)의 ‘높이’다.

(3) 교회는 또한 世界(세계)를 向(향)한 생활態(태)를 가지고 있다舊約(구약)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天地(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天下萬民(천하만민)과 全宇宙(전우주)에 不斷(부단)한 關心(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구원’은 이스라엘에서 난다. 그러나 ‘구원 받아야 할 者(자)’는 天下萬民(천하만민), 極惡(극악)의 罪人(죄인)까지도 例外(예외)없이 그 計算(계산)에 들어간다. 그리스도以後(이후)의 ‘敎會’(교회)는 새 人間(인간), 새 人類(인류)의 創造活動(창조활동)이며, 한 영원한 人格(인격)을 中心(중심)으로 天下萬民(천하만민)이 모이는 운동이며, 全宇宙的(전우주적) 贖良(속량)의 目標(목표)를 向(향)한 속량사회 건설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느 宗派(종파) 안에 籠城(농성)한다거나 어느 地方(지방)에 安住(안주)한다거나 어느 階級(계급)에 아부한다거나 어느 國家(국가)나 民族(민족)에 局限(국한)되는데서 滿足(만족)하지 않는다. 敎會(교회)는 全世界(전세계), 全宇宙(전우주)를 向(향)하여 뻗쳐 나가는 거룩한 生命(생명)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충만이라”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한 곳이요, 그 生命(생명)은 또한 만물 안에 충만하시고 만물에 충만하셔서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충만’이라는 말 ‘풀레로마’는 달리도 해석할 수 있어서 ‘補充(보충)한다’, ‘완전케 한다’는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몸과 머리가 서로 그 어느 한편이 없이는 온전해질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교회도 그러하며 만물이 또한 그리스도 없이는 온전할 수 없고 그리스도도 萬物(만물)이 온전히 소략되어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하기까지는 온전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는 하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본 幻像(환상)에는 온갖 不淨(부정)한 짐승, 날짐승, 기는 벌레, 蛇類(사류)에 이르기까지 하늘의 偉大(위대)한 사랑의 보자기에 간직해 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不淨(부정)한 것도 속량된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부정타 하지 말라!” 하였다. 그리스도의 贖良愛(속량애)는 이제 全世界(전세계), 全宇宙(전우주)를 그리스도의 心情(심정)으로 채우고야 말 것이다. 이 운동의 基地(기지)가 敎會(교회)다. 이것이 活動(활동)하는 교회의 ‘넓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회보 제1호, 1957년 7월 15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