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8일 화요일

[범용기 제4권] (18) 상한 갈대 – 断(단)과 和(화)

[범용기 제4권] (18) 상한 갈대 – 断(단)과 和(화)


불교에서 “출가” 입산하여 수도승이 될 때 “단”을 내린다고 한다. 속세인정의 줄을 단호하게 끊는다는 말일 것이다. 제갈공명이 눈물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였다는 둥, 김유신이 애마의 목을 잘랐다는 등 하는 얘기가 모두 “단”의 태도라 하겠다. “스님도 인간”인데 “백팔번뇌”에서 “해탈”하는 것이 수도꼭지에서 물 나오듯 수월할 리가 없다. “자기”를 “무”에 던지는 “단”(断)의 순간, 그것은 “죽어서 사는”, “죽음으로 사는” 결단의 순간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 불교의 “사원” 자체에 “단”을 내려야 “도”의 입문에 닿는 일도 있을 것이다. 기관을 “불”(佛)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경우 말이다.

기독교에서도 교회라는 “기관”이 “예수”보다 앞서 날뛰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교회에서는 걸핏하면 “교인끼리” 교회 안에서 “교회 사업”이라는 표딱지를 붙여야 신이 난다고 한다. 그거야 교회만으로 해야할 일이 있겠지요. 그리고 그래야 효율적인 경우도 많겠지요. 그러나 전체 민족과 사회에 직접 관련된 사건인 한, “교회에서”, “교회안에서” 딴판 차릴 수는 없지 않을까요?

한국이 기독교 국가라면 또 모르겠지만, 한국은 민족으로서는 단일민족이지만 종교는 복합적이니까 적어도 민족의 할 일, 민족의 미래, ‘네이션 빌딩’ 등등에 있어서는 민족 전체와 협동하고 참여하고 어떤 경우에는 앞장서야 할 것이다.

3ㆍ1 독립운동 때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민족대표로 한 몸 되어 동참한 역사를 우리는 독립운동의 각도에서만이 아니라 종교적 견지에서도 자랑스럽게 존경한다.

필자는 한번 유교지도자 한 분과 얘기하다가 “3ㆍ1 독립선언서에 유교대표는 왜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2천만 가운데서 이름이 적혀있지 아니한 모든 사람은 다 유교인인줄 아시오!” - 말하자면 유교는 국교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미 보편화 했고 그런 특수개별화에 의해서만 그 존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상황에서 특정사건이 생길 때가 역사에서의 “결단”을 요구하는 “위기”니만큼, 그 때에는 “보편화”란 “무존재”같이 “무의미”하게 된다. 우리는 자유인이므로 선택과 결단의 매듭 없이는 “내” 삶이 세워지지 않는다. 한국교회도 “한국교회”로 특수화하려면 모든 역사적 사건 앞에서 한국교회로서의 결단과 참여가 엄숙하고 용감해야 할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