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3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206) 野花園餘錄 (其三) - 토론토에서

[범용기 제3권] (206) 野花園餘錄 (其三) - 토론토에서


4월 29일 – 김지하의 “不歸”를 읽었다.

4월 30일 - 夢見先親

5월 2일 – 김정근, 김영호, 박세진 세 젊은 박사후보생 그룹이 떤다스에 있는 “上海”란 중국반점에서 나를 위로해줬다.

밤 10시까지 얘기하다가 경용집에 갔다.

5월 3일 - “The Hunter”라는 유명한 “러시아” 영화를 구경했다. 촬영과 감독은 일본인의 솜씨라는데, 색채가 분명했다.

시베리아를 무대로, 원주민 달단족 노인과 “고자크” 군인 부대장과의 인간적인 친근감을 Story로 했다.

달단족 노인은 나무나 새나 짐승을 자기 생명과 꼭같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Animism적인 자연인이었다. 그런데 “코자크” 부대는 사냥꾼 기질이다.

요새 몹시 살벌해진 인류가 이 달단 노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원시 미개인이고 Animism(만물정령설)적인 원시종교신봉자고 산업사회와는 온전히 동떨어진 열패자라고 할 것인가?

말하자면 “등외인간”일 것인가? 다 같이 생각할 “숙제”다.

5월 6일 - 夢見伯父

5월 7일(일) - 한인연합교회에서 막내 손자 “하준”이 유아세례를 받았다. 세례 준 목사는 이상철이다.

Brampton에 옮긴 은용집에 경용 식구와 함께 갔다. 사촌 형제인 하령과 하륜이 반가와하며 기뻐 뛰놀며 헤어지기 싫어 울먹이는 모습이 애처롭다.

5월 9일 – 길가 어느집 목련(木蓮)이 탐스럽다.

5월 10일 - “전신불수”로 10년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함석헌 씨 부인이 사흘 전에 세상 떠났다는 소식이 왔다.

함석헌 선생의 외손녀 집에서 Dinner를 준비하고 이목사, 김이선 목사, 그리고 나를 초청했다. 함석헌 따님은 지금 그 집에 와 있다.

그 댁에서 함선생 부인을 추도하는 예배를 드렸다. 내가 기도했다.

마침 그 댁에 애기가 났기에 애기를 위한 축복도 남겼다.

5월 18일 – 와싱톤의 반독재민주운동 “행동파”라는 “고세곤”이 자기 일로 토론토에 왔다. 토론토 민건 사람들이 Korea House에서 월례회 겸 환영 Party를 열었다.

그는 행동파니만큼 시원스러워서 모두들 통쾌하다고 했다.

5월 21일 – 서독의 배동인이, 해밀톤에서 열릴 럿셀협회 모임에 참석하려고 토론토에 들러 내 사무실에 찾아왔었다.

6월 6일 - “Inheritance”란 영화를 봤다. Andrew Queen 주역, “富와 純愛” 사이에 싹트는 불신과 갈등을 소재로 한 좋은 작품이었다.

6월 10일 – 전충림 장로 둘째딸 “인선”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둘 다 Pianist다.

6월 14일 – 5월 20일 “뉴코리아” 사설로 발표한 “5.16은 한국 正史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내 글이 일본의 “祖國統一新報”에 연재되었다. 아무 양해도 없이 그리한 것이다.

6월 15일 – 서울 송파근방에서 교회를 창설하고 10년을 꾸준하게 애써 새 교회당을 짓고, 출석교인 2백명의 자립교회로 육성한 한신졸업생 고해성 목사가 시카고의 Ecumenical Institute에서 지도원 훈련을 받고저 도미 도중에 나를 방문했다. 반가웠다.

6월 17일 – Hartford의 곽노순 박사가 내 사무실에 예방했다. 그는 연세대 이공학부와 한신대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구약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Semitic Language에 능해서 한때 한국에 나와 문익환 목사와 함께 구약 공동번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귀국하여 구약을 가르치고 싶은데 소개해 달라고 한다. 지금 형편으로서는 어느 신학교에도 구약 Post는 만원이라고 일러 보냈다. 여기서 목사 장립도 받았단다.

사고방식이 비범하고 파격적인 성격의 인간인 것 같았다.

6월 22일 – 박재훈 박사가 점심에 초대했다.

양성우 시집 “奴隸手岾”을 읽었다.

6월 24일 – Drew대학에서 대학원 공부중인, 김정준 박사 외아들 “영일”군이 “어머니” 주재숙 여사를 모시고 나 만나러 토론토에 왔다.

6월 25일 – 연합교회 야외예배다. “주재숙”, “영일”도 나왔다. 같이 사진도 찍었다.

내게 대한 부탁은 본국 나오라는 것이었다.

6월 26일 – 수유리 “막내” 관용은 한양대학교 총장실 직속 자재과장으로 일한다고 편지가 왔다.

7월 1일 – 은용ㆍ행강 식구와 함께 가벼운 숲 포반에 소풍갔다.

7월 3일 – 은용 식구 모두와 함께 Soubile Beach라나 하는 호반 백사장에 갔다. 차로 네 시간 달려야 한다. 모래사장이 좋았다.

아이들은 낙원인양 좋아서 물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7월 4일 – 동경 정경모가 쓴 “癒着は椎陸したか?”를 읽었다.

7월 6일 – 토론토 대학 한국학생들이 연출하는 Vincent Milley작 “Endless Naration”을 감상했다.

평가회에 참석했다.

7월 8일(토) - 연합교회에서 12시 “정선”과 Alexander Douglas Scott과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주례는 신부의 아버지인 이상철 목사가 했고 나는 신부를 Escort했다.

Inter-racial Marrage인데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하객이 약 4백명이었고 교회 여신우회에서 한식피로연을 마련해 주었다.

저녁식사는 교외에 있는 Mae Watt에서 양쪽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이 모인 서구식 연회가 있었다.

용어는 영어다. 한 100명 모인 것 같았다. 사회자가 나에게 식사기도를 하란다.

영어로 기도하고 하긴 했는데 엉망이었다. “너바스”했던 모양이다.

기도문 책에서 골라 써 갖고 갔더면 좋을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7월 13일 – 김병숙 여사가 나와 이남순 여사와 김병욱ㆍ김인숙을 자기 Apt.에 초대했다.

점심인데 냉면, 지지미, 인절미 등 요리 솜씨가 비상했다. 약 3시간 시국담, 통일문제 등을 얘기했다.

저녁은 “신자”집에서 먹고 유숙했다.

7월 21일 – 박재훈 박사가 Korea House에서 Mrs. 전과 미스 “강”과 나를 초대했다.

문익환 목사 시집 “꿈을 비는 마음”이 APO편으로 내게 왔다.

모두 서정시다.

“릴케”의 영향 때문인지 상당히 보드럽다.

경용집에서 유숙했다.

7월 22일 – 경용 집에서 “할머니”가 혼자서 적적할 것 같았다. 갑작스레 그런 “동정”이 생긴다.

4시에 신문사에서 나와 집에 왔다. 집이 비고 문이 잠겼다.

얼마동안 뒷 뜰, 벤취에 비스듬히 누워 문익환 시집을 읽었다. 그래도 소식이 없다.

도루 사무실에 갔다. 오후 10시다. 사무실에서 하룻밤 지낼까 했었는데 경용이 찾아와서 같이 경용집에 갔다.

7월 23일 – 주일이다. 은용 식구가 예배에 왔기에 함께 Brampton에 가서 거기서 유숙했다.

7월 27일 – 하령을 데리고 시내에 갔다. 조손(祖孫) 동락이다.

하령은 드물게 보는 “똘똘이”였다. 오는 길에 “피자”집에서 스파게티를 먹고 여덟조각 피자 하나 사들고 집에 왔다.

Edward Garden은 아름다웠다.

7월 30일 – 은용 식구가 모두 경용 집에 와서 저녁을 같이 했다. 나는 은용 식구들과 은용 집에 갔다.

7월 31일 – 은용 식구가 모두 북쪽 무스께끼 호반 피서지에 간다. 나도 같이 갔다.

인철, 혜원이 먼저 가 있어서 산장 한채를 세냈기에 거기서 유숙했다.

호수 이름과 산장있는 고장은 Muldrew반도라는 데였다.

8월 1일 – 종일 완전 휴식이다.

“Story of Man” 중세기편을 읽었다.

은용 식구는 딴 데로 옮겼다. Perry Sound의 Kill Bear Campin Lot인데 우리나라 동해안 같이 명미(明美)한 곳이란다.

8월 4일 – 휴식, 먹고, 자고, 읽고, 호수를 보고, Story of Man 중세기편을 다 읽었다.

8월 5일 – 경용 집에 돌아왔다.

8월 6일 – 일요일이다. 연합교회에서 예배했다. 점심은 전우림ㆍ장금숙이 Korea House에서 냉면과 갈비구이를 차렸다.

그 분들은 일주일 예정으로 L.A.에 휴가로 떠난다고 했다.

8월 7일 – 하령을 데리고 다운타운데 갔다. 조손(祖孫) 同樂 제2회다.

즐거웠고 하령도 좋아했다.

8월 12일 – 백영렵 목사 맏며느님인 김은숙 여사의 만찬초대를 받았다. 옛 친구 백목사 생각도 새로워진다. 김은숙 집사는 미모의 굳센 생활투사다.

전동림 장로 환갑잔치에도 참석했다. Don Mill의 Holiday Inn에서였다.

8월 13일(일) - 연합교회에서 예배했다. 한국사람과 고락을 같이하는 일본인 목사 “사와 마사히꼬”(澤正彦)가 한국말로 설교했다.

그는 김소운의 사위다. 한국말은 한국인 그대로다. 동경제대 출신이다.

8월 15일- 해방운동은 끝난 과거가 아니라, 행군(行軍) 중이라는 취지의 방송을 녹음했다.

8월 30일 – 하령과 함게 “조손동반” 외출 제3회. 즐거웠다.

영리해서 오히려 자기가 할아버지 안내역을 담당하고 보살핀다.

8월 31일 – 오후 6시에 우리 식구의 Family Doctor의 Issac 박사에게 가서 아내의 건강진단을 청했다. T.B.인데 Active하단다. 담과 피검사에 쓸 용기를 갖고 왔다.

처의 Spitus를 검사실에 보냈다.

Town Center에 나도 X-Ray를 찍었다.

9월 4일 – Vancouver의 장범식 박사가 하기 유가로 가족 동반 토론토에 와서 이목사 집에 유한다. 토론토 민건 사람들이 와서 장박사와의 좌담회를 가졌다.

요령있는 문답이었다. 신자가 냉면 Party로 대접해 줘서 나도 면목이 섰다.

9월 5일 – 하령이 오늘부터 학교에 간다. 삼학년이 된다.

이남순 여사가 일본인 “마쯔모도”(松本清張)가 펴낸 “기다노시진”(北의 詩人) 한권을 갖고 와서 읽기를 권한다.

9월 10일(일) - 연합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동경한민통에서 촬영한 영화를 지하실에서 봤다. 민주운동자들의 수난실태가 소재였다.

9월 6일 – Don Mill Center 고층건물 501호실에 있는, 중국인 안과전문의 Luke씨에게 가서 눈 진단을 받았다.

깨알 같은 글씨도 다 읽는 흠칠데 없는 눈이라고 한다. 안경도 필요없단다.

9월 11일(월) 거처를 이상철ㆍ신자네로 옮겼다.

이 목사가 “할머니”와 나를 태워갔고 Town Center의 Chest Clinic에 가서 X Ray Specialist를 만났다. 처의 X Ray Specialist를 만났다. 처의 X Ray Reading을 들었다.

Active하지만 초기기 때문에 집에서 약 2주일 동안만 약을 먹으면 전염성은 봉쇄된다고 했다. “약” 네가지를 타갖고 이목사집에 이사했다. 지하실인 이목사 서재방에 들었다.

9월 12일 - 山家의 精舍같은 고요함이다.

강원룡 목사가 Finland 가는 길에 N.Y.에서 이목사에게 긴 전화를 했단다. 나의 귀국에 대해서도 의견교환이 있은 것 같다.

9월 13일 – 이 목사 차로 Civic Center 보건소에 같이 가서 나의 T.B.관계를 알아봤다.

“보균”(保菌)이란 것 뿐이고 활동성이 아니니 상관없고 약도 필요없다고 했다.

“그 정도의 보균은 누구에게나 있는거”라고 덧붙인다.

인철ㆍ혜원이 문병와서 놀다 갔다.

청포도 한 광우리 사들고, 처는 여기 와서 기분이 전환된 모양이었다.

9월 17일 – 김익선 목사 생일이라고 교회 여신우회에서 친교실에 잔치를 차렸다.

거기서 점심먹고 인철ㆍ혜원 식구와 함께 그리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식후에 인철ㆍ혜원 차로 이목사네 왔다.

9월 18일 – 이 목사와 Wine 한 잔씩 마신다. 향기가 몸을 돈다.

Jimmy Carter가 중동정상회담 결과를 의회에 보고하는 광경을 T.V.에서 방영하고 있었다.

9월 23일 – 사무실을 이목사집 지하실에서 이목사 서재방에 옮겼다. 그 옆에 침대가 있어서 잘 수도 있다.

정화와 정화 친구 둘이서 내 사무실 책들과 집기와 서류들을 날쌔게 짐짝으로 만들어 놓는다.

9시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이사트럭이 와서 쓰레기도 남기지 않고 Weston 지하실에 옮겨 놓았다. 지하실은 궤짝으로 만원이다. 나는 책꽂이에서 책부터 정리해 세웠다.

9월 25일 – 오후 4시 30분에 정희가 Drive해서 Doctors Hospital의 한국인 여의사로 내과 Specialist인 Dr. R. Kim의 진찰실에 갔다. 거기서 일반적인 건강진단을 마쳤다. Chest의 X-Ray는 괜찮다는 정도가 아니라 Perfect하다고 했다. 다른 의사들도 와 보고서 같은 말을 했다. 그러니까 내 Chest는 “불가침”의 성역인 셈이다.

문제는 간장과 위궤양이란다.

9월 26일 – Doctors Hospital 807호실에 입원했다. 한국인 간호원 Miss Lee가 친절하게 돌봐준다.

키를 잰다 … 5f 6inch다.

혈압은 … 190-130.

체중은 … 116pound.

병실위치는 그만이다. 창가여서 하늘보고 바람쐬고 밤이면 고층건물들의 광탑밀림(光塔密林)을 본다. 침대와 야구(夜具)도 좋다. 네시간 잤다.

9월 28일 – 812호실로 옮겼다. 마찬가지로 좋은 위치다. 자연과의 접촉은 어려웠지만 안온하다. 오늘 일과를 적어본다.

식전에 (1) 피채취, (2) 증기채담, (3) 소변검사, (4) 아침식사 – Toast, One Egg, Juice, Milk, Coffee, (5) 점심식사 – Porkchop, Vegitable Soup, Juice, Milk, Fruit Cocktel, Tea, (6) 목욕탕.

9월 29일 – 어제와 같은 채취작업 반복이다. “채담”은 이것으로 끝난다고 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조반 대신에 영양액 한병 먹은 것이겠다.

Dr. Kim이 회진(回診) 때 들렸다. 비뇨과 Specialist를 보내겠다고 했다. 얼마후에 약속된대로 왔다. 남자의사였다.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서 “Perfect”를 연발(連發)한다. Dr. Kim에게 보고한다고 했다.

법왕 John Paul 1세가 어제밤 11시에 심장마비로 급서했다고 한다. 7억 신도의 최고 영도자니만큼 세계가 떠들썩한다.

9월 30일 – 입원 제4일이다. 자리에 누워 있다.

연합교회에서 풍요한 꽃다발을 갖다 놓는다. 상머리가 빛난다. 향기도 그윽하다. 위로가 됐다.

이목사가 들려갔다.

10월 1일(일) - 종일 자리에 누워 있다. 당뇨도 있지만 혈당이 위험선에 까지는 오르지 않았으니 음식만 조절하면 큰 걱정은 없겠다고 한다. 사탕 엄금이다.

“담” 검사는 지금 배균(排菌) 중이니까 화요일(10월 3일)쯤에는 알게 될 거라고 했다.

오후 4시쯤에 경용이 오고 얼마후에 혜원이 왔다. 반가왔다.

이 목사가 지동식 박사의 “신학의 오솔길”과 홍현설 박사의 “오직 이 한길”을 가져왔다. 읽었다.

홍현설 박사는 한경직과 비슷한 타입인 것 같다. Status Quo안에서 자기교회, 자기교파를 지키고 발전시키자는 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오직 이 한길을”은 현 제도 안에서 전도하여 교인을 증가시키는 “전도” 신학이랄까! 다시 말해서 “교회주의자”라 하겠다.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를 보는 눈도 밝아야 할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우리와 상당히 접근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10월 2일(월) - Jewish Holiday라고 한다. 대부분의 의사는 쉰단다. Dr. Kim도 나오지 않았다. 오늘 해야 할 진단은 폐호흡 용량을 재는 일이다. 모두 Computer로 나오니까 기술간호원이 맡아했다.

나는 신약성서를 읽는다.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은 다 읽었기에 오늘부터 누가복음을 시작했다.

저녁 후에 신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어서 “할머니”, 정희, 정선과 Douglas가 전화로 문안한다. 기분이, 즐거워졌다.

목욕하고 같은 층에 입원중인 한국할머니를 찾아 위로했다.

10월 3일 – 이목사와 김익선 목사가 내방했다. 별 고장이 없으면 내일 퇴원할거라 한다.

유동식 저 : “민속종교와 한국문화”를 읽었다.

10월 4일 – 오후에 이목사가 와서 곧 퇴원절차를 밟았다. 병원비용 $25.50은 이목사가 냈다. 당료식사 Menu를 따라 먹으려니 성가시고 먹은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하라는대로 해볼 작정이다.

10월 6일 – 연합교회 김태진 가정에서 터키 한 마리와 포도를 갖고 문병왔다. 순정(純情)으로 주고 순정을 받는 그리스도 사랑의 공동체를 감격하며 감사했다.

효순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밤에 스카보르에 와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이영일 치과에 가자고 한다. 저녁 먹고 7시쯤 떠나 효순네로 갔다. 하령이, 서희 진짜 반가워한다. 매달려 뽀뽀하고 그동안에 된 얘기가 끝이 없다. 밤 11시에 잤다.

10월 7일 – 9시에 하령과 함께 경용이 차로 Danford의 이영일 치과에 갔다. 하령은 앞 아래턱 유치 두 개를 뽑았다. 나는 앞니 안쪽을 보강하고 왼쪽 어금니 금씌운 것은 잇몸이 온전히 썩어서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뿌리는 그대로 둬보자고 했다. 다시 경용집에 들려 이목사 집에 왔다.

나는 원래 이빨이 엉망이다. 아이 때 이빨관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10월 8일(일) - 추수감사절이다. 오후 2시 예배에서 내가 설교했다.

Burbage 선교사가 심장마비로 급서했단다. 향년 81세다.

10월 9일 – 감사절, 정선 부부가 결혼 새살림 첫 초대로 자기들 Apt.에 신부쪽 친척들을 Dinner에 초대했다. 은용이네가 못오고 다른 친척들은 다 왔다. 경용이네, 혜원이네, 신자네 모두가 왔다. 나와 “할머니”도 물론 갔다. Turkey Dinner를 차렸다.

신접살림인데 실내장식이며 가구며 알뜰하고 각기 있을 곳에 배치되 있었다. 감탄했다.

밤 11시에 산회했다. Doug와 정선은 잘 어울린 살림꾼인 것 같다.

10월 10일 – Burbage 목사 유해를 안치한 장의사에 가서 Mrs. Burbage에게 조의를 표하고 영결했다. 많은 한국교인들이 왔었다.

10월 11일 – 밝은 가을날씨다. 10시에 이 목사와 함께 college Street United Church에 가서 Burbage 목사 장례식에 참석했다. 세 목사의 분담 사회로 진행되었는데 이상철 목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Brandford의 William Scott 박사도, 아드님 부축을 받으면서 식에 참석했다. 아주 노쇄해 보인다. 금년 94세란다. 내 옆에 앉아 계셨다. 우리는 “산소”까지는 가지 못했다.

Burbage 목사는 내가 미국 유학을 바치고 돌아와 회령에 들렸을 때 내게 자택에서 축하디너 차려 주었고 그 해 겨울에는 그가 담당한 구역교회들을 순방할 때 나를 동반하고 두만강 연안 여러 교회를 역방한 분이다. 그리고 그가 Hamillton에서 이민교회를 목회할 때에 나는 유재신과 설상수를 만나려고 그리고 갔던 일이 있다. 그때 Mrs. Burbage가 설상수와 유재신을 얼마나 끔찍하게 돌봐주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주일날 그가 보는 동양이민교회에서 설교했다. 일본인 장로가 사회했었다. 버베지 목사는 한국 선교를 위한 선구자 중의 한 분이다.

10월 15일(일) - 인철ㆍ혜원이 많은 반찬과 쌀 한포대, 고기, 생선등속을 사서 신자네로 보내왔다. 부모공양의 효심에서다.

상철과 신자는 물론이고 경용과 효순도 부모에게 끔찍하게 군다. 은용ㆍ행강은 아직도 살림이 자리잡히지 않아서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늘 죄송스레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캐나다에 옮긴 초기에는 은용집에 오래 있었다. 이 세대에서 그만하면 내 자녀들이 모두 기특하다고만 느껴진다.

10월 16일 – 박재훈 박사가 L.A.에서 부인과 함께 캐나다에 정식으로 이주해 왔다. 토론토 연합교회 Minister of Music 책임자로 부임한 것이다. 이목사 집에서 교회 찬양대와 제직 약 40명이 모여 환영 party를 열었다. 신자가 냉면을 차렸다.

L.A. 얘기와 시국담 등등으로 새로 한시까지 즐거웠다.

10월 17일 - 아침 8시에 이 목사가 “장모”를 Civic Medical Center에 데리고 가서 X-Ray를 찍고 검진하고 오후 1시 반에는 나를 Dr. Kim 진찰실로 데리고 가서 건강진단 결과를 물었다. 나는 백혈구가 정상보다 반이나 부족하단다. 재검사를 요한다고 했다.

기장총회에 Guest professor로 갔던 Dr. Jay사무실에 가서 한국 다녀온 얘기를 들었다. 김정준 박사가 보낸 긴 사연의 편지도 받았다. Visiting professor로 캐나다에 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Dr. Jay의 말에 의하면 당장은 예산이 없어서 어려우나 추진시켜 본다는 것이었다.

10월 19일 – T. B. 예방 순회간호원이 와서 식구 모두가 6개월에 한번씩 X-Ray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의 T. B. 예방 정책은 철저하다. 그래도 거의가 보균자라고 했다.

10월 22일 - 楓林放燃이랄까! 장관이다.

로마 법왕 취임식 광경이 T.V.에서 방영했다. 장엄 그것이었다.

10월 24일 – 유재신 목사가 내 생일선물이라면서 전기담요 한 장을 보내왔다.

10월 27일 – 처는 경용이네가 모셔갔다. “하준”의 첫돌준비를 거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밤에 한국에서 온 목사 셋이 나를 찾아와서 많은 소식을 전해줬다. 신자가 냉면을 대접했다.

10월 27일 – Korea House에서 이번 캐나다교회에 견학하러 온 기장목사 6인을 위하여 연합교회 유지와 한신동창들이 모여 환영 Party를 열었다. 나도 참석했다.

내일이 “하준” 첫돌이라서 선물을 샀다. 선물 고르기란 무척 어려운 노릇이다.

10월 28일(토) - 효순 집에서 내 생일, 하령 생일, 하준 생일을 한데 묶어 큰잔치를 베풀었다. 친척들이 모두 초청됐다. 6시쯤에 인철ㆍ혜원과 그 집 식구가 왔다. 영철 식구, 은용ㆍ행강 식구, 현순 네 식구 모두 모였고 조금 늦게 상철과 신자와 자매들, Douglas와 정선 다 왔다. 이렇게 모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캐나다에서의 가정 생활에서 제일 큰 Family Union이었고 나의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하령과 하륜이 제일 좋아했다. 흩어질 때 하령은 하륜과 떨어지기 싫어 통곡했다.

내게 주는 선물도 푸짐했다. 이 목사 부부는 교회 모임 때문에 일찍 떠나고 우리는 11시쯤에 행강의 차로 이목사 집에 왔다.

10월 30일 – 김병숙 여사가 약밥과 지지미를 손수 만들어 들고 왔다. 정성어린 선물이다.

11월 1일 – 서울서 2백만이 데모했다는 소식이 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얘기다.

일본의 “하용” 조카로부터 편지가 왔다. 11월 10일까지에 岩手縣 水澤市 東中通 二丁目 3-1, 美山病院舍宅으로 옮긴다는 통지였다.

大戊의 妻 英淑이 9월 14일에 첫딸을 얻었는데 이름을 河蓮이라 했다는 것이었다.

11월 5일 – 최동호 장로와 이목사를 따라 Ontario Lake에 연어 낚으러 갔다. 나는 최동호 장로 배를 타고 그가 준비한 근사한 낚시도구를 갖고 해 저물때까지 낚시질에 열중했다. 결과는 강태공식이 됐다. 이 목사는 큰 연어 한 마리를 낚았다.

나는 선창에 쉬면서 “한시” 한 구절 지었다. 달 보며 호반에 돌아와 수첩에 적어뒀다. 無韻이다.

湖上鈞魚日巳暮
歸帆遲遲月色新
雲天篹芒星又稀
心興白鷗飛去來

11월 9일 – 오후 6시에 최홍희 장군 환갑잔치에 초청돼 갔다. “미시사가” 그의 저택에서였다. 태권도 사범들이 가득하에 모여 있었다. 최덕신 중장과 나를 귀빈으로 초청한 것 같았다. 최덕신 중장이 사회자였다. 그는 나에게 축사를 청한다. 나는 대략 이런 말을 했다.

첫째로, “나는 군대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고, 태권도도 모른다. 그러나 ‘도’(道)를 숭상하는 마음은 있다. 나는 최홍희 장군이 태권 ‘道’를 창안했고, 태권 ‘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높이 찬하한다. 최홍희 장군은 ‘道’의 사람이다.”

둘째로, 그는 관북출신으로 나와 동향지인이라는 것 때문에 자연감정으로 쉽게 친할 수 있었다. 개인적 친분이므로 이런 공석에서 말하는 것은 삼가야 할 줄 알지만, 만리이역에서 고향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逢故人’의 기쁨이 있다. 특히 그가 창안한 태권도가 전 세계에 우리민족 정기를 높이 선양한다면 동향인으로서 더 많이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그를 자랑스럽게 존경한다.

셋째로, 그는 이제 세계인이 됐다. 이념이 달라 서로 갈라선 유럽국가 군(群) 어느 진영에서도 태권도는 받아들이고 있다. 그야말로 “국경없는 스포츠”의 실현이라 하겠다. 등등. 그리고 결론적으로 최홍희 장군은 군인이면서도 다방면의 재능을 발위하고 있는 꿈의 사람이다. 그는 서도(書道)에도 일가를 이루고 있다. 주부자(朱夫子, 朱喜)의 “치가격언” 전문이 그의 서재에 열폭 “병풍” 글씨로 쓰여져 있다. 그에게 서도를 가르친 스승의 글씨라 했다.

“나는 지금도 그가 ‘Sports에는 국경이 없다’는 근본정신에서 이북, 이남과 서구, 동구를 태권도의 무대로 삼아 주기를 바라며 그 ‘도’가 어떤 정치게임이나 선전에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말하자면 ‘도인’(道人)으로서의 주체성(Identity)를 드높여 지켜주기를 희망한다…….” 등.

11월 13일 – 오후 6시에 강원룡 목사가 방문했다. 이 목사가 공항에 나가 같이 들어왔다. 밤 3시까지 한국정세분석을 들었다. 나에게는 귀국을 권한다.

11월 14일 – 강원룡 목사를 공항에서 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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