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187) 北美留記 第五年(1978) - Washington에

[범용기 제3권] (187) 北美留記 第五年(1978) - Washington에


3월 16일 – N.Y.에서 Washington에로.

9PM에 “Shuttle”로 한 시간만에 Washington에 도착했다.

Taxi로 국무성에 직행해서 프레이저 의원의 “한국 내의 한국 CIA 암약상”을 파헤친다는 청문회 방청석에 앉았다.

“레나드”(Korea desk 책임자)가 증언했다. 그의 종결 연설은 명 스피치였다.

나와서 이스탐불 영사관 관계로 일하다가 망명해온 “윤창오” 씨를 만났다.

오랫동안 그의 경위와 경험담을 들었다. 그는 한식당에서 생선찌개, 전복탕, 맥주 등으로 우리에게 점심을 제공했다.

청문회 후에 인권위 담당 차관보인 맑슈나이더와 International Affairs의 Laurent Morin을 그들 사무실에 방문하여 장시간 얘기했다.

모두 열성적인 협조를 약속했고 지금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Ambassador Hotel 1218호실에 투숙했다.

3월 17일 – 박한진 목사가 여관에 찾아왔다. 나이 먹었어도 여전한 익살꾸러기다.

정용철 목사도 왔다. 언제나 정중하고 착실하다.

나와 셋이서 와싱톤 병원에 갔다. 거기서 뇌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 역시 우리 졸업생인 김순회 전도사를 문병했다. 어려운 수술인데도 경과는 좋다고 했다. “어머니”가 간호하고 있었다.

나는 기도하고 격려했다. 어려운 때일수록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일렀다.

“믿음”이란 것은 내 모든 사정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스스로 걱정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손잡고 안수했다.

“어머니”는 즐거웠다.

나는 그길로 Catholic Center에 갔다.

지학순 주교가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몰래 여기 와 있다는 것이었다.

이층 치벽한 구석에 와 있다. 반가웠다. 전에와 꼭같다.

소식을 교환했다.

거기서 나와 국무성에 들러, 하원 윤리위 자워스키, 프레이저의 수석 보좌관 John Sarzburg 등을 만나 인사와 소식교환을 했다. 인품좋은 인간들이었다.

밤에는 China Inn에서 “민통”이 주최한 만찬간담회에 참석했다. 한인회 간부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공통의식이 조성되는 것으로 보였다.

3월 18일 – 한민신보 정기영의 초대로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민통 관계 간부들과 간담했다.

재미교포들이 낸 3.1 선언문에 “민통” 인사들 명단이 모두 탈락된 데 대한 불만이 있었다.

N.Y.측 얘기는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김상호가 일부러 와서 동참을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민통”의 Prestige를 존중해서라도 사전에 충분히 상의하고, Demo 행진에 대해서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상의했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와싱톤에서는 “민통”이 “터줏대감”이고 내력으로 보더라도 UM보다 훨씬 “선배”라는 것을 인정하고 매사에 신중을 기했어야 할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됐다.

나는, “지금 우리는 다 같이 박독재정권과 싸운다는 것이 제일의 사명이니만큼 우리끼리 서로 본의 아닌 ‘시행착오’ 같은 것은 서로 용납하고 총 결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통 자체 안에도 사상적인 “분립”의 기맥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충분한 양해로 행동을 같이 할 수 있게끔 성의를 다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유감이라고 말했다.

금후에는 그런 “소홀”이 없을 것이라고 무마하여 피차 양해한 것으로 알고 김상돈의 기도로 작별했다.

강영채 박사도 같이 있은 것으로 기억된다.

강영채 박사는 “불순분자”의 침투를 경계자하고 했다.

같은 날 나는 기차로 필라델피아에 갔다. 김순경 박사 주선으로 그의 집에서 유지인사들이 모여 간담했다.

다양한 “성분”의 인사들인 것 같았다. 밤 11시에 “강근” 씨가 자기 차로 “트렌톤”까지 “에스콧”해 줘서 고마웠다.

새로 한시쯤에 New Work에 내려 Taxi로 김상호 박사 집에 갔다. 중참먹고 거기서 유숙했다.

3월 19일 – 8AM에 손명걸 박사가 김상호 집에 들러 나를 Pick-up해 Inter-Church Center에 나왔다.

10시에 Assembly Hall에서 한인동지 그룹이 예배했다. 내가 설화(說話)했다.

준비한 애찬을 나누고, 헤어져서 손명걸 박사 차로 김상호 집에 가서 한 시간 쉬었다.

오후 4시에 임순만 박사의 Pick-up으로 Bronx의 안중식 목사 교회 7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하여 설교했다.

안중식 목사 사택에서 밤 한시까지 UM의 과거를 검토하고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만은 산만하여 효능적이 아니므로 역시 “단체”로서의 “조직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데 합의되었다.

거기서 UM 헌장 개정초안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Chair man은 한승인으로 했다.

안 목사 댁에서 냉면이 중참으로 준비되 나왔다.

박신화 양을 반갑게 만났다.

3월 20일 – 안중식 목사 댁에 목사들이 많이 들렀다. 12시 반에 안 목사 집을 떠나 안 목사 Drive로 라과디아 공항에 급행했다.

박창해, 임순만이 공항까지 나와 전송해줬다.

1:10PM에 출발하여 2:25PM에 Toronto 공항에 내렸다. Islington까지 Bus로 가서 Subway로 Spadina 사무실에 들렀다.

편지가 쌓여 있었다. 이 목사와 소식을 교환하고 이 목사 차로 경용 집에 갔다.

3월 22일 – 김정근, 김영호, 박세진, 세 청년이 “제3일” 발송작업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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