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185) 北美留記 第五年(1978) - 김형욱의 초대

[범용기 제3권] (185) 北美留記 第五年(1978) - 김형욱의 초대


3월 2일 – 오전에 김형욱 집 Lunch에 초대됐다.

그의 고백(?)을 들었다. 머리는 민첩하고 솔직한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1) 박정권의 운명은 오래지 않다. (2) 5월이 고비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 때를 놓치지 말고 국내외가 크게 떠들어야 한다. (3) 만일에 장기화한다면 해외에서도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 자기도 최선의 지원을 하겠다. 등등이었다.

나는 듣기만 했다.

N.Y. 동지들은 그의 “불의의 재산”이 “선”한데 쓰여짐으로 해서 그에게 어느 정도 속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몇 백만불이라도 내서 민주운동 기금으로 법인화하기를 원해서 내가 N.Y. 오기 전에도 누차 접근했었다.

그래서 내가 N.Y. 온다는 소식을 듣고 김형욱이 공항에까지 몸소 마중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KCIA의 권좌에 그대로 앉아 있는 기분인 것 같았다.

박정희 배격에는 철저했다. 3선 개선 때 반대하고 쫓겨났노라 한다.

스위스 은행에 저금된 총액수는 알기 어려우나 그가 수중에 갖고 있는 것만 해도 2,600만불은 된다는 소문이었고, “레나드”도 그 이하는 아닐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외로워한다. 생일 날에도 자기 식구 밖에 보이지 않는다. 친구가 있을리 없다.

N.Y.의 한승인, 임순만, 구춘회 등은 그의 생일날에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하느님의 긍휼을 빌었다 한다.

그는 울며 감사했단다.

그러나 “악”이 “극(極)”에 달하면 “회개의 은총”이 내리지 않는다. 그때에는 “심판”만이 노린다. 그의 처지가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싶어진다.

그는 느닷없이 나에게 묻는다.

“민주운동에 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나는 “그건 N.Y. 민주운동 동지들과 상의해 보시지요!” 했다.

내가 그에게 돈 비락질이나 온 것 같이 보여서는 안되겠기 때문이었다.

3월 5일(일) - 김홍준 장로가 자택에서 한승인, 이승만과 나를 “디너”에 초대했다.

밤 한시까지 환담하다가 내 숙소에 왔지만 너무 늦어서 문이 잠겼다.

김정순 장로 댁에서 잤다.

오늘 김홍준 장로 집에서 이승만, 임순만, 손명걸, 김정순 등이 합석 토의한 것은 WOKODEK 문제, UM과 UM대회 준비 문제, 세계기구 연결문제 등이었다.

모두 문제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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