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181) 北美留記 第五年(1978) - 첫 머리에

[범용기 제3권] (181) 北美留記 第五年(1978) - 첫 머리에


1978년 – 이 해에도 “장공”은 민주화운동을 “본직”으로 여기며 산다.

“장공”도 명색이 “목사”인데 왜 정치문제에 그렇게 열을 올리느냐는 충고도 받는다. 그러나 “민주운동”은 정치 이전의 문제다.

민주주의란 개인자유에서 싹이 터, 사회, 국가에로 자란다.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그는 “인간”일 수가 없다. 하느님이 자기를 배반할 여백을 인간에게 주지 않았다면 그 “인간”은 하느님의 “로보트”일 뿐이다.

독재자는 “인간”을 자기의 “로보트”로 만들려 한다.

“자유”는 자기만이 갖겠다고 선언한다.

“국민”은 독재정권 유지 강화의 수단으로서만 그 존재가 허용된다.

독재자에게는 “법”이 없다. 그는 “법” 위에 있어서 “법”을 자기권력의 “시녀”로 부린다. 법 아래서 만민이 평등한 것이 아니라, “내” 아래서 법이 “종”이다! 로 된다.

그러므로 사회가 없다. 있다면 노예수용소 “사회”일 것이다.

“사회”가 없으니 “사회정의”도 없다.

“출세”한다는 사람은 “편한 개팔자”요, “도살의 날”을 기다리는 꿀돼지 “유형”이다.

독재자 아래서는 한 두 사람이 “수인”(囚人)인 것이 아니다. 3천만, 또는 5천만이 송두리째 “감옥인간”이다. 독재자는 자기를 우상화한다. 그리고 국민을 우상숭배자로 만든다.

이 마당에서 “크리스찬”이 외치지 않으면 거리의 돌들이 절규할 것이다.

적어도 인간구원을 설교하는 목사, 크리스찬, 그리고 엘리트, 또는 절대다수의 “인간”이 의식화한 민중이라면 잠잠할 수 없다.

그래서 “민주” 즉 “백성이 주역”이라는 진실을 말하고 글로 쓰고 몸으로 “데모”하는 것이다.

민주운동 대열은 목사의 “이단”도 “여가”도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본직”이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목사만이 방관, 냉소, 굴종 또는 도피의 연막 속에 자신을 묻는 것이다. 폭언을 용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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