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4일 수요일

[1827] 백운산가

백운산가


‘백운산가(白雲山家)’라든가 ‘우이산사(牛耳山舍)’라든가 둘 다 통하는 집이다. 세면소에만 들어서면 백운대가 바로 눈앞에 다가선다. 눈 온 겨울이면 더욱 희다. 아침이면 등산객이 우리 집 앞길을 메운다. 무언지 잔뜩 짊어지고도 가볍게 걷는 건각(健脚)들이다. 해질 무렵에도 마찬가진데 걷는 방향만 반대일 뿐이다.

나도 젊어서는 단숨에 백운대를 오르내렸는데! 그리고 쳐다만 본다. 내 다리는 늙었는데 마음은 아직도 젊었을까! ‘백수한산 심불로(白首寒山 心不老)’란 뜻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가벼운 운동화로, 하룻밤쯤 산골 초막에서 잘 셈치고, 젊은 후배 두세 사람과 함께 떠나면 못 갈 것도 없겠지만 요는 단행하느냐가 문제인 것 같다.

집에 앉아서도 매미 소리는 요란할 정도다. 저녁때면 귀뚜라미도 운다. 밤 자정쯤이면 두견새 외마디 울음도 구슬프다. 장마철이면 물소리도 들린다. 바로 뒷문을 나가면 백운대 계곡물이 불어서 두 언덕 기슭을 비비며 흐른다. 물길에는 집채 같은 바위들이 도사리고 앉았다. 성급한 물은 그 바위들과 싸우며 곤두박질한다. 물은 낮은 데를 찾아가는 것이 본성이다. 바위가 막는다고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그래서 몸으로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며 바위를 넘는다. 바위가 높으면 앉은뱅이 나이아가라가 된다. 그 밑은 패여서 파랗게 호수로 고인다. 물과 바위 싸움에서는 뚜렷한 승부가 없다. 백년 천년 서리를 뿜으며 싸울 것이다.

동네 아낙네들은 온종일 그 물에서 빨래한다. 빨래터부터는 오염이 심하다. 그렇다고 그 물을 닦아낼 재간은 없다. 그 청소작업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루 이틀 소낙비가 퍼부으면 물길을 말끔하게 씻어간다. “피와 같이 붉은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한다.”는 성경 말씀 그대로다. 계곡의 저쪽 언덕은 우거진 송림이다. 초겨울 첫눈에, 푸른 소나무 머리에 내려앉아 가볍게 솔 가슴을 누를 때 그 포근한 자리는 보료 펴고 앉은, 안방 주인 같기도 하다. 눈 내린 그날은 거의 예외 없이 바람 없는 따스한 날이기 때문이다. 나무 위에 앉은 눈은 그 나무의 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설화(雪花)라고 했다. 눈꽃이라는 뜻이다.

한 이틀 지나면 바람이 질투한다. 눈보라가 소란을 피운다. 나는 집 안에 동면한다. 동면이라 했지만, 자는 것도 조는 것도 아니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60년 전 내 나이 겨우 20대를 넘었을 때에는 ‘우이동’이라면 1년에 한 두 번 소풍 가는 명승지(?)였다. 특히 봄철이면 벚나무(한국산 앵두나무) 꽃 구경의 본고장이어서 서울 시내 사람들이 모였다. 앵두나무는 일본의 사쿠라와 다르다.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몰려 서 있다. 꽃 핀 모습도 좀스럽지 않았다. 우이동에 오려면 미아리서 20리를 걸어야 했다. 길은 달구지가 겨우 통과하는 진흙 농로였다. 드문드문 초가집 농가가 있고 중간중간 주막집이 있었고, 엿과 막걸리, 오화당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상전벽해랄까, 지금은 너무 변해서 재미가 없다. 혜화동 너머 신설동만 해도 그때에는 논밭, 채소밭이었고, 언덕은 앵두밭이었다. 우이동 앵두나무 종류가 아니고 자라지 못하는 덤부사리 앵두나무였는데 과수원용이었다. 앵두 철에는 돈 몇 푼 안 주고서도 앵두로 배불릴 수 있었다.

왕십리에도 초가집이 띄엄띄엄 있었고, 미나리 밭이 더러운 물에 잠겨 있었다. 마포는 새우젓 장사 마을이었고, 서대문 밖에는 도살장과 감옥이 있었으며, 창의문 밖에는 과수원, 특히 능금밭이 많았다. 능금은 야생사과이다. 골물을 따라 올라가면 세검정이 있었는데, 하나로 된 바위 위에 작고 아담한 정자가 서 있었다. 그 바위는 맑은 골물에 엉덩이를 잠그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그리로 가보곤 했는데, 그것이 나의 낙이었다. 거기서 북한산 능선이 이마에 닿을 듯이 보였다. 성벽에 문루 없는 홍예문이 하나 뚫려 있었다. 아주 낭만적이어서 마음을 끌었다. 한번은 해 떨어질 무렵에 그리로 향하여 치달았다. 그 문으로 들어가 장안을 내리 달리자는 거였다. 그러나 그것이 ‘곧 거기’가 아니었다. 올라갈수록 멀어졌다. 컴컴해지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발길을 돌려 세검정 쪽으로 내리 뛰었다. 그래서 무사했다. 문루 없는 그 성문이 지금도 그립다. 웬일인지 그쪽을 눈여겨보아도 그 홍예문은 눈에 뜨이지 않는다.

언젠가는 철저하게 외성(外城)을 돌아볼 기회가 올 것이다.

이건 딴 얘기지만 내킨 김에 적어둔다. 서대문 밖 감옥을 지날 때였다. 죄수들이 발에 쇠사슬을 찬 채로 거리에 나와 길을 닦고 있었다. 나는 그 옆을 지나는데 한 중년 죄수가 간수 눈을 피해가며 ‘담배, 담배’ 했다. 담 배 한 갑 사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담배를 안 피우니 담배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몇 발자국 앞에는 담배 파는 데가 있었다. 그때 내가 좀 더 인간적으로 폭이 넓었었더라면 담배 한두 갑 사다가 간수 눈에 띄지 않게 던져 주고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분들이 얼마나 기뻐했을까? 지금도 나의 옹졸했던 그때가 부끄러워진다.

그때 창의문 밖 세검정 근처에는 창호지와 장판지 등을 만드는 데가 있었기에 나는 구경삼아 그이들의 작업과정을 보곤 했다. 닥나무 껍질을 두들겨 수조(水槽)에 처넣어 불린다. 죽같이 된 것을 나무판때기에 발라 말리다 마르면 발라내어 누른다. 죽을 많이 바르면 두꺼운 종이가 되고 얇게 바르면 얇은 종이가 된다. 모두 부지런히들 일했다. 그리고 즐겁고 신나했다. 가난해도 뭔가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았다. 세검정에는 늙은이들이 멍석 깔고 장죽을 물고 한나절 쉰다. 장기판, 바둑판도 있었다. 자그마한 막걸리 항아리도 구석에 놓여 있었다. 목침 베고 낮잠 자는 이들도 있었다. 옛날 선비들의 시회(詩會) 같은 풍류는 없었다.

우이동에도 이런 고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우이동은 그때에도 아름다웠다. 그때가 지금보다 더 아름다웠다. 골짜기는 올라갈수록 좋았다.

언제였던가, 지금 기도원이 있다는 데서부터 ‘비봉(신라 진흥왕이 세움)’에까지 가서 절벽 비탈길을 조마조마한 게걸음으로 비석까지 갔다. 비문은 천년 풍우에 마모된 데가 더러 있었지만 대체로는 읽을 만했다. 국사에서 말하는 소위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라는 것인데, 북한산 비봉과, 함경남북도 지경에 있는 이원 마운령순수비와, 함남 황초령비와, 경남에는 경남 창령비의 네 비석이 있다. 그중에서 내가 내 눈으로 본 것은 북한산 비봉의 순수비다. 일·청, 일·러 전쟁 때에 총탄에 맞은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나는 비석 몸뚱이를 안고 만지고, 비문을 읽고 하며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거기서 능선을 타고 문수봉 밑에 가서 문수암이란 절에서 절밥 먹고 한참 장안을 내려다보았다. 장안이래야 15만 인구가 4대문 안에 갇힌 소도시다. 땅에 붙은 단층 기와집들이 눈에 차지 않는다. “만국도성은 개미언덕 같고 천하호걸은 썩은 달갈 같다.”고 했다는 원세개(袁世凱)의 시도 과소평가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20대에 공부한답시고 무턱대고 서울에 올라와 남대문 쪽에서 서소문 쪽으로 들어가는 입구 어느 작디작은 기와집에 하숙한 일이 있다. 주인은 60보다도 70이 더 가까운 신수 좋은 분인데, 조공 바치는 우리나라 사자들 수행원으로 북경 다녀온 분이라 했다. 지지리 가난했지만 체면은 도도했다. 그리고 본처와 작은집을 함께 한 집에 거느리고 살았다. 본처 되는 분이 훨씬 나이가 많았다. 힘든 일은 본부인이 맡아했다. 잠자리는 작은집 소속이다. 그런데 늙은 본부인은 말없이 티없이 종노릇했다. 나는 새벽 4시면 남산 잠두에 올랐다. 그때의 남산 잠두는 아직 ‘조선신궁’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때였고, 총독부 청사는 건축 중이었다.

나는 남산 잠두에서 장안을 내려다봤다. 집은 모두 기와집이다. 단층인데 굴뚝은 없다. 밥 짓는 연기는 모락모락 담장 밑 흙 구멍으로 새어나온다. 연기(밥 짓는 연기)에 장안은 안개호수에 잠긴다. 진짜 안개 덮인 호수와 같다. 미완성이지만 총독부 청사만이 섬같이 호수 위에 머리를 내밀고 있다. 나는 잠두에서 똑바로 남산 꼭대기에 오른다. 바위벽을 직선으로 오르는 것이다. 발바닥이 자석같이 바위에 붙는다. 15분이면 너끈히 정상에 선다. 거기는 무당의 왕국이었다. 끊임없이 무당굿이 연출되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약수터에서 약수 한 바가지 마시고 하숙집에 와서 밥을 먹는다. 그때 남산은 내 정원이요, 친구요, 내 기도 성소였다. 아닌 게 아니라, 새벽 바위 밑에 꿇어앉아 기도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때 아침 연기는 향기로웠다. 솔잎이나 소나무 장작만을 태우는 번전 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검고 독한 연탄가스가 아니었다.

산 얘기가 났으니 계속해 보겠다. 평양 있을 때에는 새벽마다 모란봉 꼭대기 바위 밑에 꿇어앉아 기도했다. 일정한 자리였다. 해뜰 무렵에 청류벽 위를 걸어 집에 오는 길에도 기도했다. 어른의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좌요 대화다.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내 앞에 계신데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고 유신론, 무신론을 쟁론할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유신론, 무신론이 없다. 아버지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느냐? 아버지를 어떻게 즐겁게 해드릴까 하는 정성뿐이다. 나의 모란봉 기도는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걸으면서도 얘기하며 걸었다. 그런 의미에서 모란봉은 내 성소였다. 그리고 성산(聖山)이었다.

영변 묘향산에도 가봤다. 거기 ‘절’로서는 보현사가 대찰이다. 그 입구에 들어서자 영기(靈氣)가 돌았다. 지금은 모르지만 일제시대에는 절까지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고 좁고 험하였다. 개울가, 길 아닌 길을 꾸역꾸역 몇 시간이고 걸어야 했다. 그래도 기분은 만점이었다.

결국 산 3분의 2쯤에 광장(?)이 나오고 거기에 절 본당과 별관과 그밖의 여러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름드리 보리수가 서 있었다. 생생한 생명체였다. 잎 끝에 열매가 달려 있었다. 몇 만으로 헤일 수 없는 열매였지만 아직은 새파란 청년이었다. 성숙해서 노랗게 굳어지면 그것으로 염주를 만든다고 했다.

절이란 그 건물과 경내 구조가 천편일률이다. 경주 불국사만이 남다른 창의를 담고 있다고 할까!

보현사에서 더 깊고 높은 산로를 오르면 금강산을 연상하리만큼 깎아세운 봉우리들과 폭포들이 있다지만 거기는 단념했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동룡굴을 보기로 했다. 동룡굴 길이는 20리(?)라 했지만 아무 시설도 없었다. 솜뭉치에 석유를 부어 시커멓게 타는 횃불 몇 자루 들고 뻥 뚫린 바위 구멍으로 기어들었다. 천장에는 종유석이 조롱조롱 달려 있었다. 어머니 가슴에서 흘러내린 사랑의 고드름처럼.

절에서 내려와 산기슭에 나오니 새파랗게 맑은 강이 흘렀다. 주변은 자갈돌밭이었다. 이 강은 낭림산맥의 동백산(東白山), 소백산(小白山)에서 작은 골물들을 모아 차츰 큰 강을 이루어 횡주, 재령 등 평야를 곡창(穀倉)으로 만들고 광량만의 진남포에서 서해(西海)에 몸을 감춘다는 대동강(大同江)의 한 지류다.

종유동굴에서 어느 키 크고 무뚝뚝한 학생이 천장에 달린 굵은 종유석에 매달려 그네를 뛰다가 종유석이 부러져 내려앉은 바람에 선생에게 꾸지람을 당했지만 그 덕택에 귀중한 박물관 선물이 하나 더 생겼다.

그때 사흘 예정으로 금강산에도 갔었다. 단발령을 넘자마자 영기가 돌았다. 어두워서야 금강산 입구 어느 여관에 들었다. 밤 지내고 새벽 4시에 작은 정자 같은, 여관 옆 ‘정양사(正陽寺)’ 뒤 언덕에 섰다. 해뜰 무렵에는 1만 2천봉을 내 눈으로 헤일 수 있는 고장이라 했다. 고성능 망원경이 장치된 전망대에는 각도에 따라, 봉우리와 동천(洞天)의 이름이 나타난다.

여관에서 언덕길을 내려왔다. 길 좌우에는 미끈하게 자란 백향목 숲이 우거지고 그 중간에 넓이 1미터쯤 되는 흙길이 곧게 뻗쳤다. 우리는 향기와 영기를 마시며 걷는다. 오른편 산벽에 올라가 컴컴한 바위굴 깊숙이에 내리찍는, 키는 그리 크지 않아도 수량은 풍부한 폭포를 보았다. 금강산에서 처음 보는 폭포였는데, 이름은 명경대(明鏡臺)라 했다. 그 앞에 서면 자기의 업과(業果)가 다 보인다는 것이었다. 보덕굴 마룻구멍으로 아찔한 천길 벼랑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옥류동의 골물은 굴러내리다가 제멋대로 정착(定看)한 바위들과 부딪친다. 물과 바위의 격투가 심했다. 그만큼 구경꾼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가장 아름답다는 진주담(眞珠潭) 반석 에는 ‘양봉내’의 글씨라는 운진동천(雲震洞天)이 깊숙하게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글자 하나가 큰방 하나만큼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초서(草書)의 명수였던 것만큼 이것도 초서로 되어 있었다. 장안사(長安寺)에도 들렀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마하연’을 지나 곧장 비로봉으로 향하여 올라간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우리 뒤에는 일본 명치천황의 친동생이고 육군원수인 한원궁(閒院宮)이 따른다. 금강산 구경 오는 날이란다. 우리보다 한 10리 뒤에 온다고 했다. 그 덕분에 길은 깨끗하게 쓸어 놓았고 비로봉 올라가는 돌 계단도 새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 계단을 우리가 앞질러 밟는 것이었다. 낙엽 하나없이 싹 쓸어놓은 계단이 하늘에 닿을 듯 우리를 인도하고 있었다. 한원궁은 얼굴이 잘생기고 윗수염이 명물이었지만 몸집이 통통했기 때문에 아마도 조금 올라오다가 도로 내려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는 비로봉에 올랐다. 정상(頂上)에서 1만 2천봉을 세다가 바로 그 근처에 있는 ‘마의태자’ 묘에 참배했다. 그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태자로서 부왕의 양위, 즉 왕건(王建)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을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기에 베옷 한 벌 걸치고 금강산에 들어와 고사리로 며칠 연명하다가 아사(餓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그 초라한 작은 무덤에 경의를 표했다. 비극(悲劇)의 왕자여서 이광수의 소설 재료로 그 면모가 후세에 그림자를 남겼을 따름이다.

거기서부터는 외금강이다. 길이 두 갈래로 되어 있다. 하나는 직접 구룡폭포로 내려가는 길이고 하나는 만폭동(?)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우리는 계곡길을 택했다.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크고 작은 폭포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만물상에 모였다. 봉우리 꼭대기에 무더기로 서 있는 크고 작은 돌기둥들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보이는 게 멋이다. 가령 사자 같다 하고 보면 사자같이 보인다. 독수리 같다면 또 그렇게 보인다. 선녀 같다면 선녀로 보인다. 그래서 이것을 ‘만물초(萬物草)’라고도 한다. 창조주가 여기서 만물의 모형을 만들었다는 것이겠다.

이제부터는 내리막 길이라 신나게 뛰었다. 순식간에 온정리에 왔다. 온천 여관에서 몸 씻고 밖에 나오니 보름달이 하얗게 둥글다. C선생과 나는 약 10리 떨어져 있는 ‘삼일포’ 호수 언덕에 앉아 우선 둘이서 예배드렸다. 삼일포는 고요하게 달을 안고 있었다. 지금까지 폭포소리 물소리에 귀가 어쩔줄 모르던 터라 삼일포의 고요한 달밤은 고요 그것이었다. 달도 고요하고 호수도 고요하고 목선도 고요했다. 사람의 말도 없었다. 우리도 고요히 앉아만 있었다. 그러다가 “예배 드립시다” 했던 것이다. 영랑, 술랑, 안상, 남석 신라의 화랑들이 삼일포에서 돌아갈 일을 잊어 사흘이나 묵었다는 것도 있음직한 일이라 하겠다. 우리는 어두워진 길을 걸으며 온정리 여관으로 향했다.

다음 날에는 구룡연을 본다. 폭포 밑에서 쳐다보는 것이다. 수량은 그리 풍부하지 않으나 높이가 자랑이다. 밑바닥이 반석인데 물 힘에 패여서 꽤 깊은 늪이 되어 있었다.

온정리 유점사는 대찰(大刹)임에 틀림없었다. 금강산에서 내려오는 큰 하수가 돌짝밭을 넓게 흐른다. 발을 담그면 얼음같이 차다.

그 이튿날은 해금강이다. 거기도 부처님 전설이 심심찮게 엉키어 있었다. 금강산 봉우리들이 동해물에 목욕하러 왔다가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남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목선으로 섬과 섬 사이를 이리저리 돌다가 해변 모랫가에 내렸다. 그 길로 통천 총석정에 갔다. 몇 만년 바다와 싸우다가 끝내 “안 졌노라” 외치는 외로운 절개의 화신이었다.

낙산사에도 갔었다. 의상대사를 회상하는 ‘의상대’, 절벽에 금이 나서 깊은 구덩(Chasm)이 생겼는데 동해물이 밀려들었다 밀려나갔다 한다. 그 것도 육지와 바다와의 영원한 전투였다.

이제는 천하제일의 강산이라는 평양에로 가는 것이다. 나는 하계(下界)에 쫓겨난 선인(仙人)의 심경이었다. 우리 강산은 진실로 아름답다. 언젠가는 반드시 일본군벌의 침략에서 해방될 것이다. 아직도 숙제긴 하지만 풀리지 않는 숙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묘향산, 금강산을 품에 품고 고구려 고도(古都)에 돌아왔다고 하겠다.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라고 공자가 말했다 한다.(『논어』 권2 <옹야> 제6장) 나는 인자도 지자도 아니지만 산을 즐기는 데는 낙오자 축이 아닐 것 같다. 그래서 50년 전 기억을 더듬어 묘향산, 금강산 기행을 적은 것이다.

평양에 3년을 있으면서 구월산에 못 가본 것은 유감으로 남는다. 그래도 금강산에 가봤으니 천하제일의 명산을 본 셈이다. 지금도 정양사, 만폭동, 명경대, 보덕굴, 팔담(八潭), 장안사, 마하연, 선덕굴, 유점사, 삼일포, 해금강 등등이 내 심장을 뛰게 한다.

그래서 우이동 단칸집도 그 이름은 ‘우이산방(牛耳山房)’ 또는 ‘백운산가(白雲山家)’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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