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일 월요일

[1739] 임진각에 가다

임진각에 가다


1984년 10월 20일(토)

“空”의 생신날이다. 알리지도 않았고 집안끼리서도 어디 가게 되어 不在라고 해 두었기에 올 사람도 없다. 외할머니와 아이들만이 집에 남는다.

아침 8시에 우리 늙은이 둘과 막내부부가, 새로 총회에서 선물한 車에 合乘하여 판문점 가까이 臨津閣에 간다. 北으로 일산, 문산 등을 거쳐 3시간쯤 달렸다. 소위 “통일로”라는 길로 임진각까지 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랑군”에서 죽은 분들 기념탑 앞에서 사진찍고 미군 참전때 남긴 탱크 대포들을 전시한 外庭을 보았다. 랑군사망자 중에는 고 함태영 부통령 막내아들 함병춘도 있어서 그의 墓銘 앞에 잠깐 머물렀다.

재간은 있어도 뱃장이 서 있지 못해서 “아니다”를 관철할줄 모르는 귀동자 型의 함병춘은 불쌍하다고 느꼈다.

임진각은 3층으로 된 호화건물로서 6ㆍ25 전쟁 관계 자료나 作品 등등이 전시되 있었고 식당도 큰 Hall이었다.

랑군 기념탑 이외의 전시는 미군을 위한 것이요. 국군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미군 감시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北쪽을 카메라에 넣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준다.

“自由의 다리”,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 “판문점” 등은 아직도 더 北쪽에 있다. 임진강도 支流는 건넜지만, 本流는 훨씬 北에 허옇게 누워있었다. 우리는 말하자면 “현관”에 들어갔다가 나온 셈이겠다. 나는 임진각 매점에서 안내서 한책 사들고 나왔다. 선물이래야 어디서나 똑같은 品目의 것이어서 관광지 도장(印畫)이 다른 것 뿐이다.

경계는 삼엄했으니 신분증 보자는 헌병은 없었다. 그만큼 완화된 셈이겠다.

38선은 어서 속희 틔어야 하겠다. 아마도 몇해 안에 틔일 것 같은 예감이다. 내 살아있는 동안 내 自由로 활활 활개치며 평양에, 신의주에, 청진에, 회령에, 웅기에, 아오지에, 그리고 송진산에, 서수라에, 다리힘이 늙지 않는다면 백두산에도 가보고 싶어진다.

우리 민족은 참으로 팔자가 기구하다. 그래도 시들었지 죽은 것은 아니다. 남한에서는 國史學이 상당한 인기로 팔린다. 이것은 우리민족과 역사가 봄맞이할 예표다. 地氣가 풀린다. 묻혔던 생명이 굼틀거린다. 하늘과 땅의 바른씨가 심어지기를 기대한다.

世界史에 태풍이 오면 38선은 겨와 같이 날려갈 것이다. 그 “카이오스”를 또 다시 놓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지혜로운 열처녀가 될 것이다. 준비없이 기다리면 어리석은 열처녀가 될 것이다(마태 25:1-13).

특히 크리스챤은 한국역사를 그리스도 歷史로 변질시켜 진정한 自由와 正義와 平和으로 성격화한 사랑의 共同體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이 일에는 단절이 없다.

이런 생각하며 황혼의 길을 달렸다.

댓글 1개:

  1. 80대 중반으로 접어든 장공 김재준 목사는 1984년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임진각으로 향했다. 일종의 조촐한 생일잔치라고 할 수 있겠다. 더 늦기 전에 고향 땅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보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생각된다.

    고향을 떠난 이후 거의 50년의 세월 동안 가보지 못한 그 마음은... 오늘날 고향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우리 젊은 세대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만이라도..."

    이산가족들의 삶은 고향을 떠난 이후에 한결같았을 것이다. 이산가족들의 희망과 꿈을 외면하고 동북아의 정세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긴 세월을 달려왔다... 때로는 남쪽으로 인해서... 때로는 북쪽으로 인해서... 때로는 주변의 강대국에 의해서...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절망의 늪을 헤매기도 했다.

    피조물의 탄식을 외면하지 않는 창조주라면...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삶으로 살아간 이산가족들의 슬픔을 끌어 안아 주실 것이다. 그들은 영으로 새로운 생명의 바람으로 남과 북을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을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남과 북의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정말 어렵게, 힘들게 만들어진 기회를... 한순간의 실수나... 정략적인 술수로 날려버리기에...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 고통을 받았다.

    통일을 꿈꾸고
    통일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쉽게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지 못하고 떠나간 어르신들의 노력을...
    잊지 말고...
    한걸음, 한걸음...
    평화를 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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