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6일 금요일

[1074] 차세와 내세

차세와 내세


“누구든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눈여겨보는 사람이면 이 세상은 상실된 세상인 것같이 이 세상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같이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 세상 노릇을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도 이 세상 가운데 있음으로 해서 그리스도 노릇을 하는 것이다.”(Ethics p.71)하고 본회퍼는 말했다.

이것은 속세화한 현대에 있어서 교회도 세속형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한 구절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얘기에 놀랄 필요는 없다. 예수의 몸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됐다는 것이 성경 말씀이라면 그보다 더 철저한 세속화는 없을 것이며, 하나님이 자기의 속성인 의를 버리고 죄인들의 죄를 자기 것으로 뒤집어썼다면 그런 속화도 다시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지존한 통치권을 스스로 비우고 종의 형태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면 그 이상 더 철저한 세속화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는 모두가 세속형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전해 온 역사적인 교회는 이런 타입이 아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기독교가 또 하나의 종교로 자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욕구에 의하여 기독교를 종교화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종교에는 네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 1) 예배 형식의 제전(cultic) : 어떤 일정한 시간에 어떤 일정한 장소에 어떤 일정한 의식에 의하여 예배 행위를 집행하는 것. 2) 타계주의적 사고 : 이 세상은 잠깐 있는 허무하고 멸망할 고장이므로 사후에 천계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자는 현세 도피사상. 3) 거룩과 속됨의 구분 : 종교는 거룩하고 깨끗한 것이고 세상은 속되고 더러운 것. 신자는 거룩해진 사람이고 불신자는 부정하고 속된 인간이라는 생각. 4) 포괄적인 세계관 : 이것저것 문제 삼을 것 없이 믿기만 하면 다 된다는 생각.

이런 것이 종교의 구성 요소인데, 기독교인들도 이런 것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런 데서 그들 종교성의 만족과 위로를 얻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이 만든 이런 종교의 교주로 제단 지성소에 안치되고 신도들은 그를 향하여 예배하고 교직자는 그 중간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고 그 성역을 위하여 성당이 지어지고 그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신학이 생기고 제도와 법규와 생활규범 등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예수 자신이 이런 것을 원했는가는 문제다. 본회퍼의 말에 의하면, 예수는 절대로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런 따위 종교를 없애버리려고 왔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예수의 것이라면 기독교는 종교로 존재할 수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하비 콕스의 God’s Revolution and Maη’s Responsibility P.100, 101 참고)

콕스는 예수가 이런 종교적 요소를 얼마나 철저하게 폐기했는가를 계속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1) 의식적 예배(cultic worship)를 폐기했다. 3년 동안 제자들과 같이 일할 때에 한번도 cult로서의 종교적 예배 행위를 한 일이 없었다. 2) 예수는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영생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지금 여기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는 것이었다. 그는 ‘저 세상’이 아니라 ‘새 세상’을 도입한 것이었다. 3) 그는 세속파 거룩과를 폐기했다는 것보다도 세속을 거룩으로 뒤집어놓았다. 4) 그는 하나님께 마음문을 엶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자유하게 하는 것을 가르쳤다. 여기에서 모든 율법주의와 죄악과 사망이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속박이 제거된다고 했다.(앞의 책 p.101 참고)

나도 원칙적으로 이런 것이 예수에 대한 바른 견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 자주 이런 방향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에 있어서 당장 가능한 것이냐가 문제다. 혁명이라는 과정에서 기성 교회를 모조리 없애버리고, 그것이 종교적이었다는 의미에서 모조리 쓰레기통에 쓸어넣고 태워버리면 그것으로 본 모습대로의 예수가 그 속에서 부활할 것인가? 암만 해도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 이른바 ‘middle axiom(중간 공리)’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1) 예수와 구약종교와의 관계 : 통틀어 말해서 구약은 율법과 예언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가 그것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고 스스로 증언했다.(마 5:17) 예수 당시의 구약종교는 예언보다도 율법에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인 바리새파가 득세했고,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권세를 부리고 있었다.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은 예수와 가까운 친교를 갖고 있었지만 바리새파와 제사장,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헐뜯고 결국에는 살해까지 했다. 그 당시의 성전은 의식적인 예배장소여서 제전(cultic)과 제물이 예배의 중심이었으며, 제사장들의 직장이었다. 예수가 이런 구약종교 형태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들과 행동을 같이한 일도 없었다. 예수도 성전에 갔었지만 선교를 위한 장소로 이용한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성전 행사를 파기하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성전의 본질을 살리려고 애썼다. ‘내 아버지 집’이라고 했으며,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cult 자체를 정죄한 것이 아니라 부패한 cult 행위를 배격한 뜻이었다. 예수 자신은 cult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cult 행위를 거쳐야 할 만큼 불완전한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당장에 예수만큼 완전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중간 공리’로서의 의식적 예배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기성 교회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파기하려는 방향보다도 그것을 갱신하고 정화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재생시키는 일에 노력해야 하겠다. 우선 교회의 내향성, 교회가 안으로 오그라들어 자체 내에서 그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교회주의는 교회를 질식시킨다. 교회의 목적은 인간 구원에 있다. 선교와 봉사는 인간 자유를 위한 프로그램이다. 기성 교회가 하나님의 권세를 빙자하여 인간의 신앙과 양심을 억압하는 한, 그 교회는 심판의 대상이 된다.

2) 타계주의에 대한 예수의 태도 : 예수에게는 전혀 사후세계가 없었을까? 예수를 가장 잘 이해했다는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의 사후세계를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를 이 점에서 오해한 것일까? 예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하라 하셨다. 적어도 여기서 ‘하늘’과 ‘땅’이라는 두 개념이 부각된 것은 사실이다. 추상적인 말로 한다면 ‘영원과 시간’이랄까? 마지막 순간에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했다는 기록도 있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다고도 한다. 이런 예수의 말들을 인간들이 너무 궤변스럽게 설명하노라고 기교를 부리지 말고 소박하게 받아 들인다면 그에게 타계적인 개념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너희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 말고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던질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한 예수의 말씀도 인간 세계보다 다른 하나님의 세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에 있어서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이나 신도나 친구가 죽는 순간에 그가 온전히 흙으로 돌아가 ‘무존재’로 된다는 것을 믿고 그에게도 그렇게 일러줘야 할 것인가? 우리의 본심은 이에 항거한다. 우리가 내세의 자세한 그림은 그릴 수 없어도, 아버지의 세계는 우리의 상상에 넘치는 크기와 넓이와 높이를 갖고 있으며, 영의 세계는 우리가 아직 유치원생 정도로도 탐색하지 못한 신비의 세계라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우리를 용납하신다는 것, 그러므로 죽어도 그리스도 의 것으로 그리스도 계신 곳에 있으리라는 것쯤은 믿고 말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것을 ‘technical’한 의미에서 ‘내세주의’라고 할 것인지는 몰라도, 속속들이 현세주의인 것도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현세는 허무요, 장망성이니 속히 이에서 탈출하여 천당 길을 걸으라는 번연의 『천로역정』 그대로를 신앙의 지침으로 삼고 교회는 천당 갈 사람들의 대기소같이 생각해 왔다. 이런 것은 극단적인 내세주의여서 가장 비역사적인 생각이다. 그것은 세속 역사를 찾아와 죄와 사망 속의 인간들과 함께 살다가 그이들을 위해서 죽고 그이들을 위해서 부활하고 그이들을 위해서 다시 오시마 한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거나 무시거나 오해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도 극단의 세속화주의와 극단의 타계주의와의 사이에 ‘중간 공리’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타계주의에서도 현세란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타계를 위한 현세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타계가 인정되기는 하나 그것은 현세를 위한, 또는 현세의 연장으로서의 ‘타계’인 것이다. 바울도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너희들의 유익을 위하여 더 오래 이 세상에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세상이 온전히 천국이 되었다면 구태여 현세니 내세니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고난과 불행과 죄와 악이 뒤설레고 있는 한, 그리고 인간들이 이 ‘데몬’의 세력에 걸려서 신음하고 있는 한,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또는 국가적, 국제적으로 불의와 침략과 억압과 잔학이 진행되고 있는 한, 우리는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으며, 그 인간들 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그리스도는 그리로 가서 그들과 함께 있어 그들의 문제를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학살하는 로마를 벗어나 딴 데로 갈 때에 길에서 예수를 만났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네가 두고 온 로마에 간다. 네가 질 십자가를 내가 대신 져야 하겠기에!” 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정열을 여실히 표시했다는 점에서는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차원을 내 속에 숨기고, 오히려 그것을 비우고 ‘세속인과 함께 세속을 위하여 선교하고 봉사’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세속을 버리고 하나님 일을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세속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다닌다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는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세속화란 것은 내게서 하나님이란 차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화하는 것이다.

3) 예수에게 있어서 거룩과 속됨이 뒤집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세속을 사랑했다는 것, 세속은 하나님의 세계라는 것, 세속에서 일하는 모든 사랑들은 하나님의 일문이라는 것(그들이 모두 그런 자각으로 일하는 것은 아니다 하더라도)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간 공리’가 필요하다. 세속이 하나님의 영역이라 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속이 하나님 나라일 수는 없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지고 하나님 의식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는 언제나 필요하다.

크리스찬은?

모든 크리스찬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맡아 그 길을 걸어야 할 교직자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교회는 이 일을 위한 병참기지다. 교직자는 이 일에 있어서의 전문가며 지도자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이를 추진하며 실천하는 것을 본직으로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산 행위며 사는 생활이며, 우리의 손과 발이 머리와 함께 움직이는 몸의 제물이다. 선전, 참예, 모험, 수난 등등의 극적인 전개를 통하여 세상에 말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맡기고 그들을 통하여 세계 만방에 그것을 전파하게 하려 했던 것과 같이 그는 지금 크리스찬에게 그것을 맡겼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자기 소유로 만들어 스스로 교만한 ‘게토’ 형태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복음을 이방인에게 맡긴 것과 같이 크리스찬이 이 일을 등한시하고 자기들끼리만 안으로 굳어질 때 하나님은 이 거대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세속 사람들에게 맡길 것이다.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혁명의 추진, 역사의 변혁은 세속인에게 맡겨졌다. 이런 오늘의 현상에서 우리는 적어도 바울 정도의 자각과 그리스도 사신으로서의 삶을 모험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 모이라는 선교보다도 세속에로 흩어져 나가라는 선교를 역설해야 하겠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했다. 교회가 얼마나 갔는가를 자랑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교회가 얼마나 세속 속에 흩어져서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종들의 종들’이 되느냐를 자랑할 수 있어야 하겠다.세상에 직접 부딪쳐 보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구조악이 대사(大蛇)처럼 모든 인간을 그 몸으로 휘감아 비틀어 조이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런 구조악에 대결하려면 선도 구조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조선도 이미 되어 있다. 교회는 처음부터 세계적인 구조를 가진 몸이며, 그밖에도 선을 위한 세계적 조직체들이 이루 헤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 왜 악은 강력한데 선은 무기력한가? 특히 기독교회는 그렇게 무기력한가? 저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자부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무대에서 악을 묵인하는 것은 악에 동조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교회가 ‘예’와 ‘아니오’도 똑똑히 발언하지 못하고 역사의 위기를 넘겨버린다면, 저력인지 비겁인지 범인으로서는 분간하기 어렵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1) ‘복음운동’을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하는 개인적 내세주의에 집중시킨 것이 그 첫 이유라 하겠다. 여기서는 개인적으로 예수 믿는다는 것과 천당 간다는 것이 직접 결부되고 세속 또는 역사란 것은 온전히 탈락되었다. “꿈 같은 이 세상 취할 것 무어냐?” 하고 노래한다. 장례식에서는 어울릴지 모르나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노래다. 자기도 세상 밥을 먹고 세상 의복 입고 세상 길을 걷고 세상 물건을 쓰면서 그런 무책임한 소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2) 교리 지상주의 때문이었다. 역사적 사실이란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실을 취급하는 역사가의 견해에 따라 그 사실이 엄청나게 다른 평가를 받게 되는 것과 같이 교리가 신구약성서를 기본으로 하고 수립된 이론이라 할지라도 그 교리를 진술하는 신학자의 견해가 그 평가를 좌우한다. 가령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일본 사람은 대륙 침략전을 성전, 즉 거룩한 전쟁이라고 했지만, 중국 사람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교리에 있어서도 정통주의자들은 자기들의 교리를 영원불변의 진리라고 내세우는 데 반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영원불변이라는 그 자체가 비진리라고 반격한다. 그러므로 교리를 최고의 표준으로 삼 는다는 것은 바리새적인 율법주의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 자신을 쳐다보며 그의 정신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해하며 그가 어떻게 인간을 위하셨나 하는 점을 살펴 인간 상위의 행동규율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

3) 복음의 사회화 프로그램이 없었다. 악의 세력은 거대한 조직체를 갖고 개인으로서는 맞설 수 없는 강한 전면적인 탄압으로 임하는데 복음은 온전히 개인적인 베이스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어쩌다 물리는 한 마리 한 마리의 고기를 낚는 데 지나지 않는다면 무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각각 개인으로서도 부지런히 많이 잡으면 그것으로 사회화도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구조적인 근본적 변혁을 성취하지 못하는 한, 일시적인 다소의 영향밖에 끼치지 못한다. 교직자가 민족의 목자라면 전체 사회로서의 청사진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회화란 공산주의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 인간적인 몸으로서의 사회 형태 를 말함이다. 폭력으로 묶어 놓은 강제 집단이 아니라 사랑과 이해로 얽힌 자유하면서 봉사하는 창조적인 인간 공동체인 것이다. 교회는 이런 인간 공동체를 세계적인 레벨에서 실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국 교회는 복음적인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영혼을 죽은 다음에 천당으로 가게 한다는 방향에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천당 가는 차표를 미리 사놓는 것이라는 거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의 대합실같이 되어 있다.

부흥회는 한국 교회에서 신앙을 자극하고 불신자를 신앙으로 인도하는 거의 유일한 행사로 되어 왔다. 요새는 그것이 점차 쇠퇴되고 있기 때문에 사경회, 특별집회 형식으로 대체되고 있다.

미국의 빌리 그래함 목사는 세계적인 부흥사다. 그가 힘있는 설교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내세우는 것은 역시 개인적인 회개를 바탕으로 한 복음주의적 구원이다. 그의 논리는 성경의 문자에 의존한다. 클라이맥스에서는 언제나 “성경이 말한다(the bible says).”라고 강조한다. 그가 사회적인 악덕을 규탄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구조의 문제에 까지는 파고들지 못한다. 구조악의 문제에는 철저하지 못하다. 따라서 본격적인 사회화 문제에까지는 파고들지 못한다. 예컨대 그에게는 본격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제시가 없는 것 같다.

5월 중에 그는 한국 교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서 사상 미증유의 대부흥 집회를 갖기로 되어 있다. 그가 진정 사회화한 복음을 갖고 있다면, 한국에서 그가 외쳐야 할 특수한 메시지는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한국은 진정 한국의 현실을 파헤치고 거기에 생명이 폭발하는 하늘의 씨앗을 심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스도 메시지의 사회화는 오늘의 핵심적인 과제며 요청이다.

댓글 1개:

  1. 예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역했지만, 역사의 현장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기독교가 2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가끔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만을 강조하면서 타계주의적 아편이 되어온 것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철저하게 비판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복음의 사회화... 장공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 메시지의 사회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핵심적인 과제이며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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