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9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251) 北美留記 第六年(1979) - 전두환 등장

[범용기 제3권] (251) 北美留記 第六年(1979) - 전두환 등장


79. 12. 12에 전선사령관인 전두환은 소위 “숙군구테타”를 일으켰다. “군인”인 박정희가 “군인”인 김재규에게 살해됐다는 것은 군율이 문란해졌기 때문이라는 구실로 우선 “숙군구테타”부터 착수했다.

 
그는 박정희대통령살해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의 직위에 앉았다.

“군”의 제1인자라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하고 자기 패거리인 “이희성 중장”을 대장으로 승격시켜 그 자리에 앉혔다.

동시에 “숙군쿠데타”에 동참한 수도경비사령관, 특전단 사령관을 등용하여 수비를 강화했다.

어떤 최고권력자가 급작스레 살해됐을 경우, 그 범인을 신속 체포하여 처형하는 것이 자신의 권력찬탈행위를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전략이란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그래서 박정희를 살해한 KCIA부장을 사형에 처함과 아울러 정승화 총장에게도 중형을 가하고 자기 자신이 KCIA부장직을 겸임하여 KCIA를 완전히 장악했다.

전두환은 이에 성공함으로써 박정희의 후계자란 면목을 세웠다. 그리고서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반체제의 제일인자인 김대중을 비롯하여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등 박정희 직계 실력자들도 체포해 버렸다.

그리고 이미 구상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자리에 취임함으로 해서 박정희를 계승한 권력의 제1인자가 됐다.

이 음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육참총장 관저 부근과 국방성 주위에서 대규모의 총격전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 사상자 실수는 후일의 역사가 밝혀줄 것이다.

지방으로서는 전라도가 눈엣 가시같이 찌른다. 전라도는 야당 제1인자 김대중의 고향이니만큼 전두환에게 심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5ㆍ17 쿠데타 직후에 광주사변을 일으켰다.

일어났달 수도 있고 일으켰단 수도 있어 그 내막도 알송달송이다.

전두환은 “종주국”(?)인 미국 “인지”(認知)를 받아야 했다.

특히 군대는 미8군사령관의 지휘권 아래 있다. 전두환은 체제확립의 보장을 신임 미국대통령 “레이건”에게 제청했다.

“레이건”도 자기 정권의 “안보”를 위해서는 한국의 안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레이건은 전두환의 요청에 따라 “전”을 와싱톤에 불렀다. 그래서 자기의 “매파”로서의 외교자세를 과시했다.

“한국 정권이 안보만 제대로 해 준다면 인권탄압 등 다른 사태는 ‘내정불간섭이란’ 간판 아래 봐준다”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민주”고 윤리고 없는 것이고 다만 집권욕만이 돋보이는 것이다.

그 후의 “미”와 “일”의 다국적 업체는 “한국”이란 경제식민“의 옥토를 매점한 셈이 됐다.

어쨌든, 광주에서 천명 단위의 동족을 학살했다. 죽은 자가 280명(?)이라지만, 병신된 자도 “죽은 자”를 부러워할 정도로 “삶”을 “죽음”으로 뒤틀고 있는 것이다.

“법”없이 죽였으니 죽인 자는 “살인자”다. 국민이 가만 있을 수 없고 세계여론이 잠잠할 수 없다. 그러면 전두환은 무슨 소득을 노리고 그런 살인극을 저질렀을까?

추측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두 가지를 지적할 수는 있을 것 같다.

(1) 이 반체제 궐기 사건을 정적인 김대중과 관련시킴으로 김대중을 사형에 처하자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금출처, 지령 등을 조작하여 “김”을 국가반란죄로 처형하자는 것이겠고,

(2)는 “경상도 정권”(?)을 하나의 “왕조”로 존속시키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그 등용인물의 연고지와 근대화 시설의 경상도 집중 등의 실태를 보아 “억측”상임을 드러낸다고 보겠다.

이상하게도 “삼국시대”가 재현한 것 같게 됐다.

나는 그 동안 “서독” 순방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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