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2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9)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 연금

[범용기 제3권] (9)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 연금


나는 1971년 12월 6일 소위 비상사태 선언의 날부터 자택에 연금됐다. 글로 비판하고 설교나 강연에서 인간존엄과 사회정의 해방신학 등등을 말하기도 했지만 그때만해도 ‘박’이 일인독재에 그렇게 자신만만하지는 않았었기에 스스로 조심스레 굴었던 것 같다.

KCIA, 소관경찰서, 치안국, CID 등에서 감시원이 따라 다닌 것은 사실이었으나 노골적인 압력 행위는 없었다.

어느날 낯선 사람 하나가 찾아왔다. 치안국에서 왔노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 “김박사님 쓰는 글, 하시는 말씀이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모조리 청와대에 직접 보고된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아, 그거 좋은 소식이구려! 나는 청와대까지 가기 전에 어디선가 증발되 버린거나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거기까지 간다니 소망적이구려!”했다.

그는 입이 쓴지 - “그래도 조심하시지요” 하고서 나갔다.

하루는 KCIA 어느 대령이라는 훤칠하고 상당히 지성적으로 보이는 인물이 찾아왔다. 자기도 “김박사님의 애국충정을 이해하고 있노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도 이 헌법이 우리 자손 대대로 내려간다면 한사코 반대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북의 남침계획에 맞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서는 이렇게 국민총력체제와 군대식의 명령계통 확립이 절대 필요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김박사님도 당분간은 양해해 주셨으면 해서 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말했다. “그런 실정일수록 국민의 자발적인 협력이 필요합니다. 국회 결의에 대한 대권수탁일 수도 있는데 국회해산, 3권독점으로 민권을 무에 돌렸으니 이제부터는 탄압, 조종, 매수 등 부정수단으로 밖에는 다스실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는 건설과 진전보다도 반발과 폭력의 악순환에서 맴돌다가 비극적인 파멸에로 끝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민주주의가 세계역사의 방향이란 것은 공인된 사실이니까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국시로 하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에는 민도와 경제조건이 따라야 한다는데, 그렇지 못한 후진국가들은 모두 민주주의에서 이탈하고 있지 않습니까?”하고 그는 반문했다.

“민도가 낮다는 것은 일제가 식민지 통치 수단으로 안출한 한국인 열등감 조장 정책의 하나였습니다. 문맹률이 10%도 안되는 국민, 유교, 불교, 기독교, 천도교 등등 고등종교의 문화와 교양 속에서 자란 민족이 그렇게 판단력이 없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경제와 인간의 기본 자유와는 반드시 유착된 것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가난하지만 옳고 바르게 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의 ‘선비’의 마음이란 유물론적이 아니었습니다. 선거에 있어서 ‘부정선거’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은 집권층과 부유층의 부패세력이요 일반국민은 아닙니다. 그런 부패세력이 작용하지 않는 경우 국민의 한표, 한표는 신성하고 깨끗합니다.…”

KCIA 손님은 시종 겸손하고 친절했다. 그는 “저도 자식들 먹일 것만 있으면 이런 짓은 안할 것입니다”하고 떠났다.

그러니까 역시 ‘유물론’이 현실을 작정한다는 주장을 그런 어법으로 남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번은 밤 열두시 지나서 전화가 걸려왔다. 형편없이 투박스러운 함경도 말씨였다.

“당신 김○○요?”

“그렇소!”

“여보 당신 이게 어느땐지 아오? 건방지게 민주운동이고 뭐고 나발불지 말란 말이오. 그 따위 짓 하다간 언제 어디서 없어질지 모른단 말이오. 당신 아직 살려주니 목숨이 붙어있는줄 알고 건방진 짓 그만하라구. 집이구 가족이구 언제 싹 멸망할지 모른단 말이오. 이건 제일차 경고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경고해 줘서 고맙소!”하고 끊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침착하니까 멋쩍었던지 그 다음에는 그런 전화가 다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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