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8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74) 한국인의 캐나다 이주와 상철(태평양에 “다리”를 놓는다) - 상철 캐나다 유학

[범용기 제3권] (74) 한국인의 캐나다 이주와 상철(태평양에 “다리”를 놓는다) - 상철 캐나다 유학


구식 서울 기와집 행랑 볕 안드는 한평 반만한 냉동골방에 몸을 가눈다. 그것도 변동이 잦아서 걸핏하면 나가란다. 한달에도 한두번 보따리 몇 꾸러미를 “리어카”에 주워 싣고 비슷한 딴데로 옮긴다.

금호동 자기 언지 집 고깐 옆에 형부인 신영희 의사가 작은 판자집을 붙여 짓고 거기 와 있으라 했다. 그래서 얼마 동안 거기도 있어 봤다. 거기는 “떠불”로 고생스럽다면서 다시 셋방으로 옮겼다.

수유리 집은 도대체 건평이 14평 밖에 안되지만 마당만은 넓었다.

“이 뜨락에 판자집 한칸이라도 있었으면…”하고 신자는 “엄마”에게 혼잣말처럼 뇌였다고 들었다.

상철이 캐나다 간지 2년째였다. 신자는 자궁병으로 고생에 고생이 겹쳤다. 서울대학 외과교수로서 수술의 명수라는 분의 사설 의료실(그의 자택)에 가서 진단했다.

자궁에 혹이 생겼으니 수술해야 하겠단다.

수술했다. 꽤 큰 혹이 유리 알콜통에 담겨 있다

“음성(암)은 아니니까 곧 나을 겁니다”

의사의 말이다. 마룻방 저쪽 모퉁이의 작은 온돌방이 “병실”이었다.

신자는 잘 참는 성질인데도 몹시 신음한다.

나는 미리 의사에게 “자궁을 다 들어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의사는 다시 임신할 수 있을 정도는 남겨 놓았단다.

“아주 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한, 그러는 것이 의사의 윤리입니다…”

그랬다고 다시 임신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들었다.

나는 섭섭했다. 신자의 몸에서 딸은 셋이 났지만, 아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회복은 순조로왔다.

상철이 학업을 마치고 귀국할 때가 가까웠다. 신자의 몸도 정상으로 회복됐다.

이번에는 자기네 힘으로 수유리 우리집 가까이에 작은 독채 집을 전세로 얻었다. 뒤뜰에는 잔디 마당도 있었다.

상철은 크리스천 아카데미 총무직을 맡아 성실하게 일했다. 그러다가 다시 캐나다로 가면서 신자도 같이 갔다. 뱅쿠버 근교 백인교회에서 초청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상철 신자 캐나다로 떠날 때, 여비 한 푼도 도와주지 못했다. 벽걸이 그림 하나도 선사하지 못했다. 주머니가 비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잖느냐 하겠지만, 없다는 것만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정”과 “한”이 맘 속에 서린다. “인생이란 외로울 때 자란다”, “까닭없는 고난에서 알찬다”고 한다. 그러나 꼬마 셋을 빈손으로 떠나보내는 “할아버지”란 보기 드물 것이다.

상철이 위임맡은 교회는 회원의 대다수가 백인이다.

일본인 어부들의 교회와 2차대전 후 합친 교회였다. 지금은 일본인, 백인의 혼성 회중이다. 상철은 예배때, 같은 내용의 설교를 영어와 일본말로 연출해야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새로 이민온 한국인들에게 설교도 했다. 그것이 현재의 뱅쿠버 한인연합교회의 모체가 됐다.

한국에서 캐나다로 옮겨오는 한국인과 그 가족이 많아진다. 그들의 대부분은 덮어놓고 오는 것이어서 이민국 관계, 세관관계, 거처 마련 등등에 철모르는 어린애 같았다. 당장 있을 데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영어는 “깜깜”이니 취직할 수도 없다. 상철은 우선 이민국에 가서 통역한다. 입국 수속을 한다. 거처를 마련한다. 마땅한 거처가 없으면 자기 집에 데리고 온다. 집은 그리 협소하지 않으니까 여기저기 끼어 며칠이고 지낼 수는 있다. 그러나 여관집 같이 부산하다. 그래도 신자는 자기 할 일로 알고 즐겁게 협력했다.

상철은 그들의 취직 알선 때문에 밤낮 뛴다. 집살림만으로도 목사 봉급으로서는 어림도 없다. 신자는 취직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