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13)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 수술

[범용기 제3권] (13)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 수술


성서공회 총회에서 이용설 박사와 김명선 박사를 만났다.

김명선은 언제나 농담이다. “젊은이, 얼굴이 왜 그래?”

나는 대략 병상을 얘기했다. 소변이 마치 비 새는 천정에서 물방울 떨어지듯 한다고 했다. 이용설 박사는 웃으면서 “그것 ‘전립선’ 비대증 때문인데 당장 떼 버리라구!”, “수술 안하고 치료하는 법도 있긴 하지만, 거저 떼 버리는 게 빠르고 시원해!”, “속히 하라구!”

그래도 나는 수술을 단행하지 못한대로 성서공회에서 진행중인 ‘새 번역’ 신약성서 최종 교열과 자주 열리는 성서공회 이사회, 성서공회 빌딩건축위원장,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위원 등등으로 거의 매일 시내에드나들었다. 아직 대한일보 논설위원으로도 그런대로 붙어 있었다. 시내로 오가는데는 주로 버스를 타는데 버스 타기란 한바탕 ‘전쟁’이다. 아니면 목숨 걸고 덤비는 피난민 ‘떼러기’랄까?

그래도 수유리는 ‘종점’이었기에 비교적 수월했다. 미아리쯤 가면 진짜 싸움이다. 문깐에 선 어린 차장은 가엾다. 들어오려는데 안 들여놓는다고 욕지거리, 어디 자리 있다고 또 들여놓느냐고 욕설 – 말하자면 욕설쌘드위치가 된다. 그러니까 몸 불편한 나의 시내왕래는 더 피곤해진다.

결국은 수술하고야 말았다.

수술기록은 1972년 7월 발행 “제3일” 제22호에 실린 병상일록이란 일기문에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러나 따로 들추기도 시끄러울 것이기에 대략 적어둔다.

1972년 6월 어느날엔가 남대문 거리를 걷다가 느닷없이 울릉도의 이일선 목사를 만났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는 으레 듣는 인사 말이다. 나는 “그리 안녕하지도 않다”면서 병상을 얘기했다. 그는 곧 “그거 전립선(소파선) 비대증 때문인데 수술을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한다.

그 이튿날인 6월 9일 – 이일선은 부인 이길화와 함께 수유리 우리 집에 찾아왔다. 안암동 자기 집에서 저녁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리로 갔다.

두어 시간 앉아 있는 동안에 너댓번 화장실로 드나드는 것을 눈치챈 이목사 부부는 당장 수술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즉석에서 우선 입원수속비로 10만원을 내놓는다. “늦추가다 방광염, 신장염 등등이 발병하면 큰일입니다”하는 것이었다. 병원은 한양대 부속병원이 좋을 거라고 한다.

그래서 1972년 6월 12일에 한양대학교 김연준 총장에게 말했다.

그는 당장 특별실 독방에 입원시켜 준다. 자그마한 냉장고, 화장실, 욕실, 옷장, 전기스토브, 간호인 침대 등등이 다 있는 910호 특별실이다.

며칠 굶고 철저하게 관장하고 예비검사를 마치고 결국에는 수술대에 올랐다.

“들것에 눕히고 낯에까지 홋이불을 덮어 씌우고 흰옷 입은 남자 둘이서던가 메고 나가는 꼴은 영락없이 ‘시체’ 운반 광경이었다. 수술실에서 수술대에 눕기까지는 기억되지만 그 다음은 모른다. 전립선이 굉장히 자라서 요도를 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병실에 돌아온 첫날은 어리벙벙한 아픔이 둔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음날은 진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마려운 오줌이 나가지 않을 때의 고통이란 유난했다. 나는 체면없이 엉엉거렸다. 부르짖음은 고통의 발산방법이었다.

배꼽 아래 중간쯤 좌우에 방광에까지 구멍 하나씩 뚫어 고무관을 꼽았다. 왼쪽 줄은 물을 방광에 부어넣는 것이고 오른편 것은 물이 방광에서 나오는 줄이다.

피는 요도를 통하여 방광으로 들어갔다가 물에 섞여 오른편 줄로 나온다. 한 주일은 줄곳 피섞인 물이 나온다.

영양은 혈관에 꼽은 링겔병 줄을 통해 수송된다.

셋째 날부터는 그리 날카로운 진통이 아니었다. 처와 이우정 선생이 늘 옆에 있어줬다. 정희도 갓난애기를 업고 자주 들렀다. 병원공기란 병균천지라서 애기에 좋잖을거라 생각되서 오지 말라고 했다.

의사들은 친절했다. 과장이 직접 들리기도 했다. 김대중 씨를 비롯하여 정계 거물들의 이름붙은 화분이 매우 많이 왔다. 조처할 곳이 없어서 간호원들 방에 나누어 주기도 했다.

경과는 청년 표준의 회복기관과 꼭 같은 날짜로 계산됐다고 한다. 의사는 놀라워 한다. 여의사 한 분은 “당뇨증세도 있었기에 슬그머니 염려했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순서대로 나아가는지 모르겠어요.”

“목사님이라 기적인 것 같은데요!”하기도 했다.

열흘만엔가 퇴원해도 된다면서 앰블랜스에 실어 왱왱거리면서 거리를 달려 수유리에 왔다. 여전히 누워있기는 했지만 병자는 아니었다. ‘소변이 쏴 하고 시원스레 나가는 쾌감!’ 그건 경험 없이 실감하긴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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