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12)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 박창암이란 사나이

[범용기 제3권] (12)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 박창암이란 사나이


그 동안에 박정희에게 소외당한, 게릴라 전술의 전문가라는 박창암이 자주 우리집에 오곤 했었다. 김종필과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지만 그만큼 그는 강직한 군인이었다.

군사 ‘혁명’때 그는 같이 도강한 주류였지만 자유당 때의 ‘정치범’을 심판하는 특검 책임자라는 미움받는 자리박에 차례지워지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는 일사천리고 그 검부러기를 처치해 버렸다. 최인규에게 사형 언도한 것도 그가 한 일이었다.

그 후에 그는 오래 무료(無聊)하게 지내다가 남북회담이 된다는 소문에 들떠서 차제에 잡지라도 하나 해 본다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잡지 이름은 ‘자유’였다.

그는 나에게 7ㆍ4 공동성명에 대한 논평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상당히 긴 글을 써 줬다.

거기서 나는 “이념과 사상과 제도를 초월하여……”란 전제가 너무 추상적이라고 지적했다. ‘제도’에서 온전히 자유하는 사람도 찾기 어렵겠지만, 인간이 현실로서의 인간인 한, 이념이나 사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공상이다. 이념도 사상도 없이 어떻게 대화가 되느냐?

“허공만 때리는 권투선수”가 되란 말이냐 등등.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공산체제와 자유민주체제 등을 대좌시키고 또박또박 따지면서 동시에 제3의 통일된, 또는 통일될 한국의 원칙적인 설 자리를 허심탄회하게 찾아봐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단일민족”이란 것도 이념과 사상이 반대되는 경우에는 ‘적’으로 대립된다는 것이 6ㆍ25 때의 시민경험에서 뼈저리게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고 대화 자체를 단념하란 말은 물론 아니다. 대화를 하되 진실하고 솔직하게,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면서 합일점을 위하여 피차 양보할 줄 아는 민족적인 기반 위에서 성실과 인내로 꾸준하게 진행시켜야 할 것이라고 해 두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단일밑족’이란 전제는 진짜 무의미한 것이냐? 그렇지 않다.

만일 이북이 일본족(族)이나 러시아족이라면 아예 이런 말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끼리니 같은 혈육으로서의 ‘사랑’이 통할 수 있지 않겠느냐? 6ㆍ25 때 인민군 ‘열성분자’라는 사람이 이남의 형제자매를 찾아 인사를 나누던 경험을 나는 기억한다. 그 순간 그들은 형제요 자매요, 친척인 것 이외로, 또는 이상으로, ‘인민군’인 것이 아니었다. “만나니 반가운 것” 뿐이었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 사랑이 ‘민족사랑’에로 발전한다면 “이념과 사상과 제도를 초월한” 하나로 남북을 통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족애”라는 활력소가 “단일민족”을 성숙시킨다.

박창암 씨가 내던 ‘자유’지는 내용이 괜찮고 부피도 있고 했지만, 출판비, 고료 등에 쓰여지는 재정 내막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박창암에게 서울시장을 하라는 둥, 공화당국회의원이 되라는 둥, 여러 가지로 회유해 오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게 와서 의논했다. 내가 보기에는 강직한 것이 그의 인격적 생명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시장’으로서 대통령 지시를 거부한다면 관료질서를 범한 죄로 처벌되고 할말이 없을 것이고, 공화당 국회의원이 되도 ‘거수기’ 노릇밖에 못할 것인데 그런걸 각오하고 하겠거든 하시오. 했다.

그는 둘 다 거부하고 야인으로 머물면서 ‘육사’에서 시간강사로 게릴라 전술을 강의한다고 들었다. 지금의 소식은 모른다.

남북공동성명의 반응은 국제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1973년 11월 21일 제28회 UN 총회 정치위원회에서는 남북한의 대립된 두 제안을 둘 다 채택하고 타결의 기회를 모색하기로 했다 한다. 그날 정치위원회 의장의 성명 내용을 보면 UN은

① 1972년 7ㆍ4 남북공동성명에 있는 통일 3원칙을 인정한다.

② 남북간의 대화를 추진시켜 남북간의 다면적 교류협력이 실현되도록 희망한다.

③ 국련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해체한다.

등등이었다.

그 후 얼마 동안은 이남의 대이북방송에서 상대방을 모욕하는 욕설이 없어졌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며칠만이었고 또 다시 험악하고 거친 말투가 쏟아져 나왔다. 박정희는 “국제정세의 급변과 이북의 남침준비”라는 것을 구실로 ‘비상’을 걸고 독재 합법화를 진행시키는데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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