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6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110) 北美留記 第三年(1976) - 스웨덴에 입양한 우리 애기들

[범용기 제3권] (110) 北美留記 第三年(1976) - 스웨덴에 입양한 우리 애기들


1976년 1월 3일(토) - 제1선 민주운동 동지인 신필균 양이 점심때쯤에 토론토의 내 사무실에 찾아왔다.

신필균은 이화대학을 졸업하고 스웨덴(서전)에 유학중이다. 이화대학 재학 중에도 민주운동의 선봉에 섰었다. 스웨덴은 한국민주화에 열렬한 지원자로 나선 나라다. 스웨덴 정부에서 장학금을 설정하고 신필균을 스웨덴 정부 장학생으로 선정해서 지금 유학중이다. 와싱톤에서 가정생활하는 언니 만나러 왔던 길에 Toronto 내 사무실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의 말 - “스웨덴 사람들은 한국 애기들을 ‘양자’로 Adapt하는 일이 많은데 한국의 어떤 중개업자들은 부양능력없는 딱한 한국 부모들을 설득하여 ‘친권’을 포기하게 하고 그 어린이를 스웨덴의 양부모에게 내어주는 모든 절차를 맡아 해주는 것이다. 스웨덴의 양부모들은 한국에 와서 애기를 타간다. 조막만한 생명을 비니루 봉지에 넣어 들고 간다. 그 중에는 제법 큰 아이들도 있다. 7, 8세로 10대 소년까지 섞인다. 스웨덴 공항에 내리자 아이들은 각기 낯선 ‘양코백이’들에게 끌려간다. 제각기 혼자다. 철든 아이들도 그때에사 자기들이 팔려가는 것을 알게 된다. 마구 통곡하기 시작한다. 안 가겠다고 자기 부모들을 부르며 길바닥에 딩군다. 기진맥진하여 앉은채로 잔다. 서서 울던 아이들은 선대로 꾸벅꾸벅 존다.”

신필균 여사의 마음에는 ‘차마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인상밖에 남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입양한 한국아이들 인구가 천에서 1만명 선에 이르고 있단다. 오랜 후일에 어떤 역사가 형성될른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 후예에서 스웨덴의 “요셉”이 태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하느님은 고난을 통하여 영화(榮華)를 빚어낸다. 그러나 심판이 앞선다는 두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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